TV수신료와 전기요금을 분리징수하는 내용의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이 12일 공포와 동시에 시행된다. 대통령실이 관계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부에 수신료 분리징수를 권고한 지 한 달여 만이다. 전기요금과 함께 수신료를 위탁징수해온 한국전력은 분리납부 시스템을 마련하는 한편 당장 수신료 수입 급감 위기에 놓인 KBS는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11일 국무회의에서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별도로 징수하기 위한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한 총리는 “수신료 분리징수는 현재의 납부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국민의 목소리에서부터 시작됐다”며 “이를 통해 수신료 납부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게 되고 수신료에 대한 관심과 권리의식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개정안은 전기요금 고지서에서 ‘수신료’ 항목을 제외하는 내용이다. 방송법 시행령 제43조 2항 ‘지정받은 자(한전)가 수신료 징수 시 고지행위와 결합해 행할 수 있다’를 ‘행해서는 아니 된다’로 수정해 전기요금과의 통합징수를 금지했다. 개정안은 지난 5일 방통위 전체회의 의결을 거쳐 6일 차관회의와 11일 국무회의를 연달아 통과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 의결 당일 오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방문한 리투아니아에서 전자결재로 개정안을 재가했다.
시행령 개정을 주도한 방통위와 산자부는 대통령 재가 직후 보도자료를 내어 새 법령의 취지와 기대효과를 설명했다. 정부가 내세우는 분리징수 시행 이유는 ‘국민 불편 개선’이다. 지난 1994년부터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합산해 징수하면서 TV가 없는데도 수신료를 납부하거나 수신료 미납만으로 전기가 끊기는 불편을 분리징수로 해소할 수 있다는 취지다.
방통위·산자부는 “앞으로는 수신료가 따로 고지되고 따로 납부할 수 있어 국민이 수신료 징수 여부와 그 금액을 명확히 알 수 있고 잘못 부과된 경우 바로 대처할 수 있다”며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한전이 전기요금 미납으로 보지 않게 돼 단전 등의 우려도 없다”고 부연했다.
개정안은 별도의 유예기간 없이 즉시 시행돼 실제 분리징수까지 혼선이 빚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전은 수신료 고지서를 별도로 제작·전달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과 분리징수 수납시스템 보완에 약 3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그사이에 분리 납부를 원하는 국민은 한전에 신청하면 된다.
분리징수가 시행된다고 해서 수신료 납부 의무가 사라지진 않는다. 방송법 제64조는 ‘TV수상기 소지자는 수신료를 납부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다만 분리징수로 납부 회피자가 늘어날 가능성은 크다. 만약 TV를 가지고 있는데도 수신료를 내지 않으면 미납 수신료의 3%(월 2500원 기준 70원)가 부과되고, KBS는 방통위의 승인을 얻어 이를 강제 집행할 수 있다. 그러나 향후 방통위의 ‘승인’ 여부가 관건이다. 이에 대해 방통위는 “국민의 편익과 강행집행 비용 문제 등을 고려해 판단하겠다”고 했다.
KBS는 분리징수가 시행되면 납부 회피 등의 여파로 연 6200억원대이던 수신료 순수입이 1000억원대로 급감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또한 한전은 수신료 별도 고지서 제작과 발송 등에 연 1800억원대의 추가 비용이 든다고 추산하고 있다. 이런 이유 등으로 그동안 KBS와 한전은 종전의 통합징수가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의견 내왔지만, 개정 과정에선 반영되지 않았다.
KBS는 방통위가 개정안을 의결한 지난 5일 “시행령이 바뀌어도 방송법상 ‘수신료 납부 의무’가 유지되기 때문에 국민이 수신료를 따로 납부하는 번거로움만 따른다. 오히려 불편이 증가하고 국민 부담만 가중될 위험이 크다”며 “공익적인 콘텐츠 제작에 써야 할 비용 수천억 원이 수신료 징수에 무의미하게 낭비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KBS는 분리징수가 현실화하자 지난 10일부터 신규 사업 중단과 기존 사업 재검토 등 비상경영에 돌입한 상태다.
개정안은 논의 시작부터 시행까지 그 내용과 절차에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출발지는 대통령실이었다. 대통령실은 직접 지난 3월9일부터 한 달간 온라인 투표 방식의 국민참여토론에 ‘수신료 징수방식 개선’을 안건으로 올렸다. 투표 결과 개선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96.5%였다. 다만 한 사람이 여러 번의 투표를 할 수 있어 신뢰도 문제가 제기됐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이를 근거로 방통위와 산자부에 분리징수를 권고했다. 방통위는 통상 40일인 입법예고 기간을 열흘로 줄여 개정안에 적용해 빠르게 처리했다. 차관회의와 국무회의 의결, 대통령 재가까지 일사천리였다.
현재 재직 중인 방통위 상임위원 3인 가운데 유일하게 개정안에 반대한 김현 위원은 11일 입장을 발표해 “방통위는 용산 비서실의 주먹구구식 사업을 그대로 이행하고 집행하는 곳이 아니다”라며 “오늘 국무회의 의결은 오랜 민주적 절차와 국민 합의로 진행된 제도를 졸속 처리해 국민에게 부담만 가중시키는 악법으로 변경한 것이다. 정부의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로잡는 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국민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앞서 지난달 KBS는 시행령 개정 절차를 정지해달라는 취지의 가처분을 헌법재판소에 신청했다. 방통위의 입법예고 기간 단축에 대해서도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12일부터 시행되는 개정안 자체에 대한 헌법소원도 곧 낼 예정이다. KBS는 “정부가 시행한 수신료 분리고지가 공영방송에 대한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지 확인하고, 어떤 형태의 수신료 징수방식이 국민 대다수에게 이익을 드릴 수 있는지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분리징수 시행을 비판하는 언론현업·시민단체들은 국회가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1999년 헌법재판소가 ‘수신료 금액과 징수절차 등은 입법기관인 국회가 결정해야 한다’고 판시한 만큼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3개 단체는 11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시행령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 재가는 헌재가 결정했고 방송법이 규정한 국회의 권한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폭거”라며 △공영방송 공적재원 공론화위원회 구성 △개정안을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 △공론화위원회와 개정안 논의를 위해 김진표 국회의장이 여야 중재 등 3가지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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