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보지 않을 권리'는 없다

[이슈 인사이드 | 젠더]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2012년 6월. 당시 미국 뉴욕에서 살던 20대 초반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퀴어 축제’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한국 사회 전반에 소수자 감수성이 발달하지 못한 때였다. 방송인 하리수나 홍석천만이 떠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성소수자였기에 ‘게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말초적 호기심도 일었다. 분명 주변에 없었을 리가 없는데, 왜 그토록 그들은 눈에 띄지 않았을까. 일상 속 존재 가능성을 상상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한국의 ‘정상 규범’은 강력했다.


편협했던 나의 ‘정상 세계’는 요동쳤다. 성소수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 같은 이들이 아니며, 퀴어 축제 역시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과 관계없이 ‘동등한 시민’임을 서로가 증명해 주는 모두의 무대임을 알게 되면서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꼭 붙잡은 시민들과 아름답고 자유로운 복장으로 개성을 뽐내는 성소수자들은 행복하게 거리를 누볐다. 성소수자를 잔뜩 태운 도시의 상징 2층 투어버스까지 행진에 동참하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경찰의 안전한 통제 아래 성소수자 운동 명소인 크리스토퍼가(街)를 행진했다. 5번가에서 시작해 7번가로 이어지는 퍼레이드 진행 동선은 명실상부 뉴욕의 중심이었다.


그로부터 9년 뒤인 2021년 한국. 대선 후보까지 지냈던 유력 보수 정치인은 TV 토론에서 ‘퀴어 축제를 보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며 “해외에서 퀴어 축제는 ‘도시 외곽’에서 개최된다”고 말했다. 팩트는 언론의 검증 보도에 의해 ‘가짜뉴스’임이 밝혀졌고, 인권위는 발언이 혐오표현에 해당한다고 의견을 냈다. 하나, ‘따옴표 저널리즘’을 통해 그의 발언에 녹아 있는 편견은 이미 날개 돋친 듯 확산한 후였다.


오늘날 ‘보지 않을 권리’는 소수자를 차별하는 ‘다수 독재’의 레토릭이 됐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SNS에 “성소수자의 권익만 중요하고 성다수자의 권익은 중요하지 않느냐”며 대구퀴어문화축제 개최를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축제는 열렸지만, 도로 점용을 두고 시 공무원들과 경찰이 몸싸움을 벌이는 소동이 일었다. 매년 서울광장에서 열렸던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지난 1일 을지로 일대에서 열리게 된 배경에도 ‘다수의 보지 않을 권리’를 채택한 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의 불허 결정이 있었다. 365일 중 고작 하루, “성소수자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메시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를 과연 다양성과 관용을 핵심 덕목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라 볼 수 있을까.


불법이 아닌 존재를 ‘보지 않을 권리’란 누구에게도 없다. 악덕기업을 향한 ‘불매 운동’이나 황색 언론을 규탄하는 ‘폐간 운동’ 같은 ‘캔슬(취소) 컬처’는 불평등한 권력 구조 속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움직임이다. 정상 규범 속의 다수가 사회적 소수자를 억압할 때 사용되는 ‘보지 않을 권리’는 다르다. 어떤 다수도, 권력자도 타인의 존재 자체를 ‘캔슬’할 수 없다. ‘장애인·노인·어린이·외국인·여성을 보지 않을 자유’ 같은 발언을 공론장에서 허용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세계대전 당시 인종혐오와 우생학이 득세했던 전체주의의 풍경과 다름없을 것이다.


아무리 유력가의 말 하나, 문장 하나가 기사가 되는 시대라지만 언론이 ‘보지 않을 권리’ 같은 말까지 받아쓰기식으로 보도해도 괜찮은 걸까. 기실 이를 외치는 정치인·행정가를 만들어낸 데에는 그 같은 혐오 발언을 여과 없이 나른 확성기 언론의 기여도 적지 않다. 이러다 언젠가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언론을 향해 ‘보지 않을 권리’를 외치게 되는 건 아닐까. 왜인지 그날이 오더라도 언론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만 같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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