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들은 ‘돈 봉투’를 ‘거마비’라고 불렀습니다. 영호남 지역구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올라왔던 걸까요. 아니면 글자 그대로 말이라도 빌려 타고 왔던 걸까요. 뭐든 적절치 않은 금액입니다. 그런가 하면 원외 본부장들은 의원님들보다 한참이나 얇은 봉투를 받아갔습니다. 여의도의 금배지는 기름값도, 택시비도 6배쯤 올려버리는 걸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마케팅은 네이밍이 반이라고 합니다. ‘돈 봉투’를 ‘거마비’라고 부르면서 의원님들의 부담은 크게 줄었던 것 같습니다. 20명은 ‘부주의한 소수’나 ‘일탈’로 볼 수 없는 수입니다. 무려 20명의 현역 국회의원들이 주저 없이 봉투를 받아 간 데에는 뛰어난 네이밍이 큰 몫을 했을 겁니다. 혹시 “고생 많아 보이네. 뇌물 좀 만들어뒀으니 갈 때 챙겨가”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거마비보다는 정확한 표현이니 더 올바른 반응이 나오진 않았을까요.
“3김시대 말고는 그런 거 없다.” 취재 당시 관련자로부터 들은 답변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3김시대를 30년쯤 훌쩍 넘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아주 비상식적인 현실입니다. 이 사태는 비참한 윤리의식과 부정부패 외에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너무 투박하고 촌스러워서 오히려 신선하기까지 한 부정부패였습니다.
‘고무신 선거’가 60년대의 일입니다. ‘옛날엔 우리 수준이 이랬다’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리가 이 과거를 비웃을 수 있었던 건, 스스로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저런 웃기는 짓 하지 말자고 우리는 그 오랜 기간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치열하게 싸웠고, 대학가에서 싸웠고, 직장에서 싸웠고, 삶의 여기저기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워 왔습니다. 그간 부유해진 생활수준과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우리는 그때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열심히 하다 뒤돌아보면 그래도 우리가 조금씩 더 나아져 있을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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