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의 소탐대실

[컴퓨터를 켜며] 김고은 기자협회보 편집국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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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노동시간 감축! 노예계약 요구하는 EBS 규탄한다!’, ‘적자경영이 미화노동자 잘못이냐! 미화노동자 해고사태 EBS가 책임져라!’


일산 EBS 사옥 앞 도로변을 따라 색색의 현수막들이 걸렸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아 정확히 헤아려보진 못했으나, 족히 20~30개는 될 것 같습니다. ‘노예계약’, ‘규탄’ 등등 펭수와 뽀로로의 EBS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와 풍경들입니다.


현수막의 주인은 공공운수노조 경기지역본부 산하의 지부와 분회들입니다. 같은 본부 소속 EBS분회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의미입니다. EBS분회는 청소노동자 부당 해고와 일방적 인력 감축에 반발하며 한 달 넘게 출근 투쟁과 피켓 시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노조를 만든 지 이제 한 달 좀 넘은 이들은 지난 8일 EBS 앞에서 열린 해고 규탄 결의대회에 함께 한 ‘동지’들의 연대 발언을 들으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집회를 마친 뒤엔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라 믿고 더 열심히 마음으로 뭉칠 것을 다짐”했습니다.


지난 4월 EBS가 전년 대비 3억4000만원 적은 예산과 3명이 줄어든 인력 규모로 청소용역 업체 신규 입찰 공고를 냈을 때, 이런 상황까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듣기로는, 청소용역을 아예 없애려고도 했는데, 청소노동자가 사회적 약자임을 고려해 “최소한”으로 줄인 거라고 하더군요. 나름의 ‘배려’를 했다는 건데, 오히려 청소노동을 평가절하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직원들이 직접 주변 정리를 하는 것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청소노동이 하찮은 것일까요. 청소노동자들이 ‘투명인간’처럼 일한다고 해서 정말 투명인간인 양 여겨선 안 됩니다.


EBS를 규탄하는 이들은 또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선한 이미지를 쌓아온 EBS가 ‘노조 탄압’ 같은 어울리지 않는 구호 속에 등장하고, 전형적인 ‘악덕 원청’ 행태를 보인다는 이유에섭니다. ‘용역업체 소관이지 우리 책임이 아니다’라는, 원청회사들의 익숙한 논리 말입니다. EBS 사측은 해고가 아닌 ‘계약만료’이며 ‘우리’와 상관없다고 했지만, EBS 구성원들은 ‘우리’ 문제라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정규직 노조인 전국언론노동조합 EBS지부가 연대 성명을 냈고, EBS분회의 투쟁을 직·간접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EBS의 ‘위선’적인 태도가 회사의 평판 실추 등 ‘위기’로 이어질 거라는 점에서 심각성을 느낍니다.


하지만 사측의 태도는 완고합니다. 청소노동자들의 고충은 듣겠지만, 노조(EBS분회)와는 대화나 협상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고 합니다. EBS와 계약한 용역업체만 700개가 넘는다는데, 여기서 물러섰다간 줄줄이 무너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바꿔 말하면 인원 감축이 청소노동자에서 끝나지 않을 거란 거지요. EBS는 이미 파견직·계약직 100% 감원을 예고한 바 있습니다. 그때마다 ‘어쩔 수 없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반복할 테고요.

김고은 기자협회보 편집국 부장대우


이런 상황까지 내몰린 EBS의 사정을 모르지 않습니다. EBS는 지난해 256억원이란 최악의 적자를 냈습니다. 공적 책무는 그대로 다하는데 각종 보조금과 지원금은 줄고, 학령인구가 감소하며 교재 판매 수입도 줄고요. 방송광고 시장 또한 나빠지는 데다가 겨우 70원만 받는 수신료 수입도 분리징수다 뭐다 해서 더 줄어들 가능성이 큽니다. EBS로선 뾰족한 해법을 찾기 어려운 형국입니다. 그래서 더 걱정스럽습니다. 청소노동자를 ‘사람’이 아닌 숫자와 비용으로만 보고 여느 원청 기업들과 다름없는 태도를 보인다면, 언젠가 EBS가 공적 지원을 호소할 때 누가, 어떤 명분으로 연대의 목소리를 내줄 수 있을까요. EBS가 1억원도 안 되는 청소노동자 3명의 임금을 아낀 대가로 그 이상의 가치를 잃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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