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KBS 수신료 분리징수를 밀어붙일 태세다. 한상혁 전 위원장을 면직시킨 뒤 여당이 지명한 김효재 상임위원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에 들어간 방송통신위원회는 14일 관련 법령 개정 안건을 논의한다고 한다. 대통령실이 방통위에 수신료 분리추진을 권고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았으니 속도전도 역대급이다. 김의철 KBS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통령실의 분리징수 추진) 권고가 철회되는 즉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지만 대통령실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라며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찬반 논란이 뜨거운 상황에서 깊은 사회적 논의 없이 대통령실과 정부여당이 속전속결로 나서는데 다른 뜻이 없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수신료 분리징수 주장에 타당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급부상 등 매체환경이 급변하면서 공중파 TV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시청자들이 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수신료를 전기요금에 묶어 두는 나라도 그리스, 이탈리아, 튀르키예 등 몇 나라밖에 없다. “시청자들의 선택권이 제한된다”는 대통령실의 주장은 그 점에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수신료 분리징수가 불러올 파장을 감안하면 이는 결코 속도전 식으로 추진할 정책이 아니다. KBS 측에 따르면 분리징수가 이뤄진다면 6200억원대인 KBS의 수신료 수입은 1000억원대로 줄어든다. 당장 5000억원의 적자가 난다는 얘기다. 수신료 분리 징수로 인한 수입 감소에 대한 재원 보완 대책이 없다면 문을 닫으라는 얘기 아닌가. 결국 KBS에 광고시장을 개방해야 할 터인데 방송시장에 미칠 혼란은 어쩔 셈인가. 헌법재판소가 수신료를 방송시청 여부와 관계없이 부과하는 준조세 성격의 ‘특별부담금’으로 규정한 것은 공영방송의 사회적 가치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은 KBS만이 할 수 있는 재난방송, 장애인방송, 국제방송, 한민족방송 같은 공영방송의 기능은 아예 포기하겠다는 생각인지 묻고 싶다.
시청자 선택권의 확대라는 표면적 이유와 달리 ‘방송보도를 공정하게 해달라’(대통령실 고위관계자), ‘공영방송의 근간을 훼손한 주범은 민노총 언론노조, 언론노조가 분리징수를 초래한 주범’(박성중 국민의힘 의원) 등 수신료 분리징수 추진에 맞춰 집권 세력 내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 폭탄은 정략적 의도를 의심케 한다. 이미 거대 양당은 KBS가 상대편이라고 생각할 때는 수신료 분리징수로 KBS를 압박하고,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할 때는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여왔다.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도 2003년 노무현 정부 당시 분리 징수 입법을 추진했지만 여당이 된 이명박 정부에선 분리징수가 아닌 수신료 인상을 추진한 바 있다. 집권 여당이 총선에 올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신료 분리징수 카드로 KBS를 길들이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신료 분리징수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면 정부는 치열한 숙의의 자리를 마련한 뒤 결론 내리기 바란다. 탈원전 정책이나 대입제도처럼 충분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수신료 제도와 공영방송 필요성을 판단하는 공론조사는 좋은 방법일 터이다. 중복 참여도 막지 않고 표본 추출도 하지 않은 허술한 온라인 여론조사로 응답자 96%가 찬성했다며 일을 벌이는 건 낯뜨겁지 않은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정성 시비를 자초하고 매체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위기를 맞이한 KBS의 뼈를 깎는 쇄신 노력은 필수다. KBS도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설득하는 데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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