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퇴근 시간 돌아보면 남은 게 없다. ‘내가 오늘 뭘 했더라’ 되뇌며 퇴근하는 직장인의 하루. 요즘 박준용 한겨레 탐사1팀 기자의 매일매일은 대략 이렇다. 얼마 전 한 달 가량을 준비한 기사가 출고됐다. 탐사보도는 2~3개월 간 한 사안을 깊이, 다각도로 취재해 내놓는다. 보도가 나갔으니 다시 시작. 뭘 할지부터 찾아야 한다. “바로 다음 할 게 준비된 때도 있겠지만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해보기 전엔 모를 때도 많고요. 기초 취재부터 해야 되는 상황이고요.” 지난 10일 오전 10시30분께,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1번 출구 앞에서 만난 그가 바삐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일단 ‘전세 사기’ 아이템을 후보로 올렸다. 지난해부터 큰 이슈가 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들은 현재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이다. “꼭 우리 성과가 빛이 나든 안 나든 피해자들한테 도움이 된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방송사를 중심으로 이미 많은 뉴스가 나왔다. 후발주자로서 “아예 늦었는데 이미 나온 보도를 단순 반복하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지”가 고민이다. 아이템이 결정되면 긴 기간, 다른 보도를 못한다. 팀 차원에선 결과물이 이 기회비용을 벌충할 수 있을지 고려도 필요하다.
오전 시간 농성장엔 사람이 없었다. 밤에 다시 오기로 하고 인근 카페로 이동한다. “올해 내내 갈 이슈일 텐데 일단 2~3주 안에 (지금) 할지말지는 정해야 할 것 같아요. (아이템이) 안 정해졌을 때랑 정해졌는데 앞길이 막막할 때 좀 힘들죠. 다른 기자 아이템을 같이 할 수도 있지만 마음속에 할 걸 품고 남을 도와줘야 마음이 편하죠. 이거 끝나면 뭐할 건데 고민이 늘 있죠.”
탐사 기자의 ‘기삿거리’ 찾기… ‘혼자’의 시간
여의도 한 카페 2층 구석에 자리한 오전 11시, 갑작스레 할 일이 생겼다. 후배 기자가 보도에 쓰인 설문조사 참여자에게 사비로 ‘커피 쿠폰’을 제공했는데, 비용처리 방법을 물어봤다. 노트북을 펴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며 약 20~30분 간 전화·카카오톡으로 회사 관계자, 후배 기자와 연락했다. 이 번거로울 수 있는 잡무처리는 탐사 기자에겐 좀 다른 측면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 팀 전체 회의를 빼면 거의 혼자 움직이는 만큼 근무시간 동료 목소리를 들을 일이 정말 드물어서다. “실익이 없잖아요. 같이 다니면 ‘오늘 힘들었다’ 얘기도 하고 저는 좋은데, 드물죠.”
출입처가 없기 때문에 타 언론 기자를 만날 일도 흔치 않다. ‘청년허브’처럼 공적으로 제공하는 업무공간, 예전 출입한 기자실 중 붐비지 않는 곳을 전전한다. “평일에 카페를 너무 많이 가서 주말엔 카페를 잘 안 간다.” 점심도 혼자 ‘써브웨이’에 가서 참치샌드위치를 먹고 마는 때가 많다. 취재원 말곤 아는 사람을 한 명도 못 볼 때가 대부분이다. “혼자 다니면서 형사들이 괜히 2인1조로 다니는 게 아니구나 느낀다니까요.(웃음)” 팀원 4인(팀장 1인 포함) 기자가 모두 이렇게 혼자 움직인다. 각각 자신의 아이템을 관철시키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아이템이 결정되면 최대 기자 2인이 붙어, 넓고 깊게 판다. 그전에 무엇을 ‘넓고 깊게’ 팔지 정해야 한다.
저녁 약속은 잘 잡지 않는다. 퇴근하면 곧장 집이 있는 신도림으로 향한다. 와이프와 둘이 산다. 결혼한 지 8년이 됐다. 1988년생 기자는 2014년 경제지 아시아경제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기자 선배면서 부서 선배이기도 했던 연상의 와이프를 만나 이듬해 식을 올렸다. 그해 10월 ‘시사저널’로 이직했고, 2017년 7월 한겨레에 경력 입사했다. 현 직장에선 미디어팀, 사회부 법조(검찰), 탐사팀, 사회정책부를 거쳐 최근 다시 탐사 부서로 돌아왔다. 경력 상당 기간을 탐사부서에서 보낸 기자의 퇴근 후 낙은 ‘혼술’이다. “술을 좋아하는데 오히려 좋아하다보니 취재원이랑 먹기가 싫어서요. 그렇게 건진 게 큰 의미가 잘 없더라고요.”
국회도서관 뒤지고, 제보자 만나고…
한가하던 카페가 붐비는 점심시간을 지나 다시 한가해진 오후 1시, 잡무를 처리하고 기사·자료를 검색하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일어났다. 근처 해장국집에서 주문하고 먹고 계산하기까지 15~20분 남짓, 곧장 국회도서관으로 넘어갔다. 마음이 좀 급하다. “출입처가 없으니까 매번 아이템을 정하면 새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출입기자만큼 팔로업 하려면 1~2주는 걸리더라고요.” 자료 검색용 컴퓨터에 앉아 전세사기 관련 논문, 책 등을 살폈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논문을 읽고, 머리를 싸매고, 책 정보를 찍어둔다. 열람실을 뒤져 궁금했던 자료도 찾았다. “나중에 써먹을 수 있는 자료 같기도 한데 막 아주 결정적인 건 아니었어요. 전세사기 피해자도 1세대, 2세대가 있는데 큰 흐름은 알 수 있었고요.”
오후 3시, 이젠 출발해야 한다. 오후 4시 선정릉역 근처에서 제보자를 만나기로 했다. 전세사기 제보는 아니다. 현재 1순위이지만 만약을 대비해 대안이 있어야 한다. 현재 2~3개 서브 아이템을 후보의 후보로 두고 취재여부, 경중, 보도시점 등을 저울질 중이다. 몇 년 전 박 기자가 쓴 기사를 보고 제보자가 이메일을 줬고 이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아왔다. 박 기자는 지하철에서 “피해자가 있는 건인데 보도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권력과 연결망은 있는지 잘 판단이 안 서서 못 다뤄온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진행형의 문제인데 제가 다른 부서에 있거나 못 챙길 때도 항상 정보가 업데이트 돼 있는 분”이라며 “본인 삶을 걸고 이렇게 추적하는 제보자는 잘 없다”고 부연했다.
두 시간 넘게 대화가 이어졌다. ‘자본시장법 위반’과 관련한 제보. ‘피해자가 많다’, ‘수사기관이 무마했다’, ‘정치인 ○○와 연관이 있다’ 등등의 이야기. “조금 덜 나온 얘기들이 있었어요.”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는 길 곰곰 생각에 잠긴 박 기자가 말했다. 탐사 부서에서 제보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이에 국회의원실을 다니며 알음알음 얘길 듣고, 유튜브에서 나온 폭로를 잇고 합쳐보기도 한다. “굳이 따지자면 의원실로 온 제보는 타율이 좋고, 저희에게 온 제보는 홈런일 수 있다.” 다만 방송사와 경쟁하던 과거를 지나 이젠 유튜버와도 경합하게 되며 제보는 많이 희소해졌다. “유튜버에게 던지면 바로 폭로가 나오잖아요. 저흰 이게 개인 분쟁을 넘어 공적인 의미가 있는지 봐야하는데 기사가 안 나가면 ‘관계자가 누구 간부 동창이라 안 나간다’ 이렇게 보기 쉽잖아요. 지금 시점엔 ‘제가 씁니다’라고도 못하니까 긴 시간 만나는 것도 좀 조심스럽죠.” 저녁식사로 부대찌개를 먹으며 그가 말했다. 자료를 읽어보고 사람 한 명 만났는데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감 안하고 취재만 하면 기자도 괜찮다’는 언론계 우스갯소리가 잘 와닿지 않았다.
결과가 의미 있다고 과정도 좋을 리가… 탐사 기자의 애환
탐사보도가 상을 받는 일은 종종 있다. 지난 3월 박 기자는 <서울로 가는 지역 암 환자, 고난의 상경치료> 보도로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지역 불균형의 문제를 의료 측면에서 조명한 보도는 서울 대형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버스·고속열차에 줄을 선 암 환자와 보호자가 겪는 현실, 이들이 머무는 대형병원 앞 원룸·고시텔·셰어하우스 등 ‘환자방’의 실태를 상세히 전했다. 사회정책부 소속으로 지난해 11월 취재에 나섰고 총 46명 인터뷰, 188명 설문조사 결과를 담아 지난 1~2월 나온 보도였다.
지금과 달리 우연하게, 가족과 병원에 갔다가 찾은 아이템이었다. 명함 형태의 환자방 전단지를 받고 찍어뒀는데, 얼마 후 회사에서 부서별로 1명 기자는 긴 기사를 쓰도록 빼주는 ‘프로젝트 한 달’을 시행했고 여기 제출한 아이템이 선정된 것이었다. 대부분 취재를 혼자 했다. 미디어기획부와 영상 협업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작가 노릇도 했다. 사정사정 해서 환자방에 계신 분을 섭외, 2주 간 상주하며 취재하려다 환자방 사장님이 거절하며 엎어지는 일도 있었다. “1~2년차였으면 한 3일 앞을 지키며 사장님을 설득했을 텐데 그렇겐 못하겠더라고요. (웃음) 많은 분들이 도와주서 가능했어요. 백혈병 걸린 아이·어머니와 함께 기차도 타고, 셰어하우스에 밤 늦게까지 머물며 취재했어요. 방송사면 출연료라도 드릴 텐데 죄송스러웠죠. 어려운 여건에 있는 분들일수록 하루 시간을 내 기자와 얘기하는 게 더 어려운데 사례비는 못 드리는지 고민이 필요한 것 같아요.”
2018년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 2020년 <웹툰 플랫폼과 작가 계약 그곳은 ‘개미지옥’이었다> 등 그가 참여했던 굵직한 기획보도가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모든 작업에서 가장 큰 비중은 단연 사람을 만나 얘길 듣는 일이다. 진이 많이 빠지는 일이라 “하루 두 명까진 괜찮은데 세 명이 되면 좀 힘들다.” 상대하는 이가 모두 호의적이거나 예의를 갖출 리도 만무하다. “취재 시작한 영역이 남들이 다 한번 하고 간 데면 ‘뭐 어떻게 하려고 또 왔냐’고 하는 거죠. 새 영역을 뚫을 때도 기자를 본적이 없으면 피상적인 이미지로 적의를 갖고 대하거나 ‘바쁜데 왜 이러냐’ 그러기도 하고요. 그런 취급을 받고 나면 한 1시간은 아무 것도 못해요.” 정부 부처에서 박대를 당하기도 한다. “‘출입기자도 아닌 기자와 얘기해서 얻을 게 뭐냐’는 식인 거죠. 물어봐도 답도 안 해주고요. 몇 주 전엔 두세 번 전화했는데 계속 그래서 ‘이것도 안 되면 누구한테 어떤 대답을 하시려고 그러냐’고 싸웠어요.”
남은 게 없는 하루의 의미… “약간 좀 더 많이 알게 됐다일까요?”
만 10년차 기자는 이 일이 “잘 맞는 거 같다”고 생각한다. “다른 건 자신이 없을 정도로 딱 맞는다는 게 아니라 다른 직업은 이 정도로 저를 봐주지 않을 거 같아요.(웃음)” 대다수 사람에게 직업은 밥벌이지만 그만으로 평생을 버티긴 쉽지 않다. 자긍심이나 보람,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이유가 필요하다. “살다 보면 자기 위주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건 제 위주로 생각하면서도 약간 공익도 생각해야 하는 게 섞여 있으니까요. 이걸 하며 늙으면 나중에 제 생각만 하는 사람은 덜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많은 회사원들에게 지금 그 회사를 다니는 이유를 물었을 때 나올 답처럼 일을 시작한 데 거창한 뜻은 없었다. 오히려 ‘기자’와는 거리가 먼 20대까지의 삶이었다. 고향 부산에서 나고 자라 서울로 대학을 왔고 경영대에서 회계세무학을 전공했다. “취업이 잘 될 거 같아서 전공을 한 건데 안 맞는 거죠. 그래서 아무 것도 안하고 술만 먹었어요.” 단지 전공이 싫어서, 부모님이 기자란 직업을 좋게 말한 기억이 있어서 기자를 해보자 했다.
경영대에서 기자 지망생은 흔치 않았다. “3학년 2학기부터 기자를 본격 준비했는데 이후 한 반 년까지 태어나서 기자란 사람을 아예 본 적이 없었어요.” 대통령 이름만 겨우 알 정도로 뉴스도 보지 않았었다. 스터디를 꾸리고 언론사 입사를 준비했다. 졸업 쯤 학교 언론고시반에 지원했다 떨어졌고 이후 세명대저널리즘스쿨(현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에 입학했다. 여기서 1년, 총 2년을 준비해 경제지 기자가 됐다. “회계가 싫어서 기자를 한 건데 첫 직장에선 기대를 좀 하셨던 거 같아요.(웃음)” 이후 시사주간지에서 지금과 같은 긴 호흡 기사를 경험했고, 한겨레에서도 이런 경력을 이어오는 게 현재다.
오후 8시30분, 다시 전세사기 취재. 퇴근시간 9호선을 타고 해가 진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전세사기 대책위 농성장을 재방문했다. 관계자와 30~40분 가량 대화를 나누고, 피해자 전반의 상황을 묻고 들었다. 박 기자는 “보유한 자료가 있는데 가치가 있는 건지 좀 알아봤다. 일단 단 건으로 쓸 수 있을까 싶다”고 했다. 오늘 하루의 성과를 물었다. “약간 좀 더 많이 알게 됐다일까요?”란 되물음이 왔다. 치열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퇴근 시간 돌아보면 남은 게 없다. ‘내가 오늘 뭘 했더라’ 싶은 빈손의 하루다. 이 하루하루가 쌓여서만 만들어지는 의미 있는 게 있다. 내일엔 오후 2시 한 국회의원실에 간다. 오후 4시30분 서울, 오후 7시20분 인천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를 만난다.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다. 이렇게 또 하루가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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