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진 해방촌의 긴 골목을 걸어올라가다 보면 다음번엔 꼭 택시를 타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모로코코’가 나타난다. 칠판에 분필로 휘갈겨 쓴 영어 메뉴판에서 ‘모로코 오버 라이스’를 찾아 주문하면, 잠시 후 정직하게 밥 위에 채소와 닭다리를 얹은 음식이 나온다.
이 음식의 또 다른 이름은 ‘망각’일 거다. 먹고 나면 다음에 또 와야겠다는 기억만 남아 다시 올 때 택시를 타야 한다는 걸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로코코의 모로코 오버 라이스는 말 그대로 찰기가 없는 쌀 위에 채소와 메인 디쉬를 올린 음식이다. 메인 디쉬는 치킨과 양고기, 새우, 비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토마토·양파·고수 등 채소가 넉넉히 올라가고 요거트까지 얹다보니, 잘 구운 닭다리가 특히 잘 어울린다.
치킨을 얹은 모로코 오버 라이스는 이태원의 터키 음식점에서 판매하는 ‘치킨 박스’와 비슷할 것 같지만 음식 구성에서 여러 차이가 있다. 모로코 오버 라이스에 얹은 치킨은 살결이 부드럽지만 탄력이 있어 나이프 날을 쓰지 않고 끝으로 가볍게 누르는 것만으로도 고기를 대부분 발라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다 보면 질리는 법. 모로코 오버 라이스는 시큼한 요거트 소스와 싱싱한 샐러드, 토마토 살사를 더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메인 디쉬가 질리거나 부담스러워지지 않는 노련함까지 갖췄다.
모로코 오버 라이스는 몇 년 전, 오랜만에 만난 취재원과 식사를 하면서 처음 먹었다. ‘채식을 해서 갈 수 있는 식당이 적은데 괜찮냐’는 그의 말에, 평소 고기만 먹던 난 당황하지 않은 척을 하려다 ‘저 흡연자에요. 연초도 풀이니까요’라며 안 하는 것보다 못한 농담을 하고 말았다.
민망해서 다시 못보겠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망각의 음식인 모로코 오버 라이스를 먹고 난 뒤 우리는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고 웃으면서 헤어졌다. 혹시 언젠가 용산구 근처에서 힘겨운 하루를 마무리한다면, 모로코 오버 라이스를 영혼의 국밥 삼아 한 그릇 비워보길 추천한다. 좋은 기억만 가져가기도 바쁜 때에,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힘든 기억들까지 다 담아갈 필요는 없지 않나.
※‘기슐랭 가이드’ 참여하기
▲대상: 한국기자협회 소속 현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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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 이메일 taste@journalist.or.kr(기자 본인 소속·연락처, 소개할 음식 사진 1장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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