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대표의 신년사나 뉴스룸 리더의 취임사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전문성’이다. 기자의 전문성 강화는 당위적인 목표로 오랜 시간 존재해왔다. 언론사 콘텐츠 경쟁력이 위태로워진 지금, 전문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뉴스룸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취재기자들은 전문성을 쌓기 어렵다. 가장 큰 걸림돌은 취재 분야를 1~3년마다 바꾸는 구조다.
기자 스스로 전문성을 확보하려는 수요도 높아진 상황에서 한 분야를 오래 취재할 수 있는 전문기자제를 도입하거나 확대 운영하는 언론사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지원 문턱을 낮춰 비교적 저연차부터 전문기자를 육성하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달 뉴스1은 전문기자 6명을 신규 발령했다. 문화 등 일부 분야에만 있던 전문기자를 확대해 내부 공모로 기후환경, 보건의료, 바이오, 북한 등 6개 분야 전문기자를 추가 선발한 것이다. 전문기자는 앞으로 최소 3~5년간 해당 분야를 맡아 집중적으로 취재할 기회를 보장받는다. 채원배 뉴스1 편집국장은 “아무래도 독자들은 깊이 있는 기사를 선호한다. 콘텐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전문기자를 확대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뉴스1 전문기자 지원 자격은 10년차 이상이었다. 올해 10년차인 황덕현 뉴스1 기자는 기후환경전문기자로 지원해 최종 선발됐다. 대학에서 대기환경과학을 전공한 그는 뉴스1에 입사해 기상청과 환경부를 출입하면서 이 분야에 관심을 이어왔다. 현재 박사과정으로 기후변화를 공부하고 있다.
황 기자는 “일반 스트레이트보다는 깊이 있는 기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기후환경 쪽으로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전문기자에 지원했다”며 “사내 전문기자 중에 막내이고 아직 한 달밖에 되지 않아 불안함도 있지만 열심히 공부하면서 심층 보도를 해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만약 황 기자가 지금 연차에 전문기자가 될 수 없었다면 정기인사로 부서가 바뀌면서 전문성을 쌓기도, 발휘하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보통 전문기자는 부장·국장급이 맡거나 전문자격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엔 주니어 취재기자들도 전문성에 관심을 보이고, 회사도 기자 경력 계발 차원에서 전문기자 진입 문턱을 낮추는 추세다.
이런 배경에서 헤럴드경제도 전문기자제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 헤럴드경제 관계자는 “우리 매체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콘텐츠 전문성 확보와 주니어 기자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주기 위한 취지로 전문기자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디지털 전환기 중심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주니어들은 변화에 더 예민하고 자기 계발에 관심과 의지가 크다. 출입처를 여럿 겪었다고 그 분야에 깊이 있는 통찰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건 아니라는 생각들도 엿보인다”며 “회사 입장에서는 기자들이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할 필요가 커졌다”고 설명했다.
현재 지상파 3사는 기자 전문성 육성제도인 ‘예비전문기자’를 운영하고 있다. KBS는 이 제도를 지난 2019년 재도입했다. 6년차 이상을 대상으로 내부 공모를 거쳐 지금까지 경제, 통일외교, 뉴스편집, 문화, 복지 등 6개분야 예비전문기자를 선발했다. 예비전문기자는 2년마다 심사를 받는데, 4년간 활동한 기자들은 다음달 이후 전문기자로 전환되는 최종 심사를 앞두고 있다.
2019년 11년차로 예비경제전문기자에 선발된 박대기 KBS 기자는 “4년간 예비전문기자로 활동해보니 예전처럼 1년씩 부서를 옮겨 다닐 때보다 확실히 배우는 게 많더라”며 “사내에서 일반 취재영역의 전문기자 선발은 처음이었고 전문가가 되기에 4년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도전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SBS는 2019년 예비전문기자제를 처음 도입해 북한, 환경, 보건 등 4명을 선발했다. MBC는 2021년 신설해 통일외교국제, 경제, 기후환경, 노동, 사법 등 예비전문기자 5명을 뽑았다. MBC 예비전문기자들은 3년 동안 활동한 뒤 전문기자 심사를 받는다.
신문사에서는 국민일보가 2009년부터 예비(준)전문기자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지원 자격은 5년차 이상으로, 2년 뒤 전문기자 전환 심사를 진행한다. 매일경제는 2020년 10년차 이상을 지원 자격으로 두고 전문기자제를 처음 도입했다. 그해 평기자를 포함해 5명을 전문기자로 선발했고 지난해 3명을 추가했다. 매일경제는 2020년 시작한 전문기자 5명에 대한 평가위원회를 다음달 개최할 예정이다.
언론사가 전문기자제를 운용해야 할 이유는 타당하지만, 도입만이 능사는 아니다. 선발 이후 당장 이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평가해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느냐가 중요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문기자에게 어떤 역할을 맡길지, 예비전문기자의 경우 어떤 기준으로 전문기자 전환을 결정할지, 일반 부서와 취재범위가 겹칠 때 어떻게 해소할지, 지시·보고 체계를 어떻게 할지 등 언론사들은 저마다 적합한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매일경제 관계자는 “전문기자제를 운영하면서 부서별 출입기자와 영역이 겹치는 부분이나 부서장으로부터 독립돼 활동함으로써 생기는 장단점이 있어 다음달 평가위원회에서 논의할 예정”이라며 “중장기적으로는 각 영역의 기자들이 관심 분야에 천착해 경력과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문기자화’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방안들도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YTN에서 18년간 통일외교전문기자로 활약하다 2020년 퇴직한 왕선택 한평정책연구소 글로벌외교센터장은 국내 언론계에 전문기자가 자리 잡으려면 3가지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첫째는 기자 본인의 의지, 둘째는 뉴스룸 리더들의 전문기자 필요성 공감대, 셋째는 전문기자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다. 왕 센터장은 “세 가지 중에 2번과 3번은 가만히 있어선 이뤄지지 않는다”며 “언론계 차원에서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왕 센터장은 “뉴스룸은 ‘전문기자’를 고연차들의 인사상 범퍼 역할로 쓰거나 한창 일할 연차라면 인력 손실로 보지만, 전문기자는 꼭 필요한 역할”이라며 “언제까지 뉴욕타임스나 아사히신문을 베껴 쓸 거냐는 질문을 던져보면 이제 우리 언론에도 풍부한 지식과 경험으로 고급 분석과 논평을 내놓는 전문기자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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