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 전북 전주의 한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특성화고 3학년생이 목숨을 끊은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소희가 죽음을 택하기까지의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많이 울었다. 그런데 형사 유진이 해당 사건을 추적하며 학교, 기업, 교육청을 ‘응징하는’ 후반부는 다소 불편하게 다가왔다. 영화의 문제의식이 ‘아이들을 그런 곳에 보내면 안 되는 것 아닌가’에서 멈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현장실습생 죽음을 보도하는 대다수 언론의 시각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아이들을 위험 사업장에 보내선 안 되며, 법과 제도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논의는 종종 현장실습 시기를 늦추고 기간을 줄이거나, 조기취업형 현장실습을 아예 폐지하자는 쪽으로 흘러간다. 혹은 ‘학생과 노동자의 경계’에 있는 게 문제이니 학생으로서 교육만 시키거나, 노동자로 규정해 근로기준법을 전면 적용하고 해당 기업의 다른 노동자와 똑같이 대우하자는 대안들이 부딪친다. 아프게도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장실습은 교육이면서 노동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2017년 제주의 한 음료 제조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기계에 몸이 끼어 숨진 고 이민호군이 일하던 공장을 찾은 적이 있다. 직원수 35명인 이 업체의 직원은, 어째서 현장실습생에게 지도 담당자도 없이 정직원이 하던 일을 시켰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태연히 되물었다. “실습생이라고 데려다놓고 옆에다 멘토를 붙여서 ‘넌 그냥 쫓아만 다녀라’ 끌고 다닐 수 있는 기업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겠나?”
잔인하고 무책임한 이 한마디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기업이 (값싼 노동력 사용이 아닌, 진정한 교육적 의미의) 현장실습에 참여할 유인’이 없는 한 근본 해결이 어렵다는 점이다. 현장실습생을 직원으로 부리지 않고 실질적인 교육을 하는 데는 비용이 든다. 이런 투자를 기꺼이 하게 하려면, 기업이 현장실습생에게 ‘숙련’을 가르칠 수 있고, 실습생이 그 숙련을 노동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으며, 실제로 대다수가 그 기업에 남아서 숙련 노동자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 현장실습생에게 일반 직원보다 적은 보수를 주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도 독일 사업주들이 여전히 직업훈련생에게 투자하고, 독일 노동조합 역시 직업교육이 ‘노동자에게도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이유다.
반면 한국 노동시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들은 학생 전공에 맞는 숙련을 가르칠 역량이 없다. 실습을 마친 학생이 자신의 숙련을 인정받을 체계도 부족하다. 애초에 성인 직원의 안전과 적정 임금조차 지키지 못하는 기업이 수두룩하다. 이런 상황에서 상당수 특성화고 졸업생들은 실습 기업을 떠나 대학에 가거나, 대기업·공기업·공무원 취업을 준비한다. 당연하게도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결국은 고교 졸업자가 숙련을 인정받으며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한국사회에 얼마나 있느냐의 문제다. 감독과 처벌의 문제일 뿐 아니라 노동시장 문제다. ‘성벽 안 일자리’에 취업하지 않아도 살아갈 만한 세계를 만드는 일은 악의 단죄만으로는 이뤄낼 수 없다. 영화의 반향으로 현장실습생에게도 직장 내 괴롭힘 금지 등을 적용하는 법 개정안이 국회 교육위원회를 통과했다. 의미 있는 변화지만, 연민과 분노를 넘어 그 이상의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소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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