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남동부와 시리아 서북부에 규모 7.8의 강진이 일어난 지 20여일이 지났다. 이번 지진으로 튀르키예서 발생한 이재민만 지난달 24일 기준 200만명. 양국에서 집계한 누적 사망자 수도 같은 기간 5만명을 넘어서면서, 이번 지진은 21세기 들어 역대 6번째로 인명 피해가 많은 자연재해로 기록됐다. 지진 발생 직후 국내 언론사들은 현장의 참상과 도움의 손길을 전하기 위해 취재진을 튀르키예에 급파했다. 이들은 약 1~2주간 현지에 머물며 생존자와 이재민들의 절망과 희망을 생생히 전달했다. 현재는 대부분 귀국해 그동안의 취재기와 후일담을 정리하고 있다.
기자들이 전한 튀르키예 상황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피해가 극심했던 하타이, 카라만마라슈 지역 등에선 건물들이 무너져 “팬케이크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고, 콘크리트 잔해와 튀어나온 철골이 곳곳에 가득했다고 했다. “폐허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그야말로 처참한 상황이었다. 지난달 8일부터 10여일간 현장을 취재했던 조해영 한겨레신문 기자는 “카라만마라슈의 경우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가 있고 그 도로 양옆에 관공서, 호텔, 상점, 주거 지역 등이 있었는데 그곳이 폭삭 무너져 있었다”며 “운동장과 트랙이 있던 경기장이 거대한 텐트촌이 돼 수백 개의 텐트가 빽빽이 들어찬 모습이 인상 깊었다. 말라티아라는 추운 지역에선 난로를 태우는데 땔감이 마땅치 않아 담배꽁초나 생수병을 넣어 검은 연기가 펄펄 나고, 그 주위를 아이들이 뛰어놀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난달 17일부터 약 1주일간 현장을 취재했던 최혁규 국제신문 기자도 “이재민들이 모여 있는 텐트촌 간 격차가 있어 상대적으로 부촌에 지원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며 “어떤 곳은 그냥 구덩이를 파고 화장실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구덩이 옆에서 텐트도 지원받지 못해 돗자리를 깔고 생활하며 세 아이들을 돌보던,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어머니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진이 발생한 직후다 보니 취재 여건 역시 좋지 않았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1시간이면 가던 지역을 12시간 만에 도착하는가 하면,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숙소나 식당을 찾기 힘들어 ‘차박’을 선택하고 음식을 구걸해야 했다. 그나마 호텔이 있는 아다나에 숙소를 구한 취재진들도 피해 지역까지 편도 4시간 거리를 매일 왕복하는 강행군을 했다. 지난달 9일부터 일주일간 현장을 취재했던 곽소영 서울신문 기자는 “피해가 심한 지역엔 사실 남아 있는 호텔이 없었고, 예약된 곳들도 막상 가보면 지진 때문에 무너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며 “3~4시간 달려서라도 호텔이 있는 지역으로 가서 자거나 그것도 안 되면 ‘차박’을 했다. 식사 같은 경우엔 매끼를 챙겨먹을 순 없었지만 구호물품이 워낙 많고 현지 분들이 정이 많으셔서 자주 음식을 나눠주셨다”고 말했다.
수도와 전기, 가스가 모두 끊긴 마당에 통신도 매번 말썽이었다. 로밍을 하고 유심 칩을 끼워도 인터넷이 오락가락하기 일쑤였고 피해 지역 중심부는 아예 ‘먹통’인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취재기자들은 간혹 인터넷이 터질 때 카카오톡과 텔레그램으로 취재 내용과 기사를 전송할 수 있었지만 사진기자들은 사진 20여장을 보내는데 1~2시간을 씨름해야 했다. 영상은 더욱 난감했다. YTN의 경우 생방송 시간이 다가오는데 통신이 터지지 않아 2~3km를 무작정 걷고, 그래도 연결이 되지 않아 생방송 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일도 겪었다. 임성재 YTN 기자는 “현지의 참상을 잘 전달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생각했는데 안타키아 같은 곳은 아예 통신이 안 터져 중계를 할 수가 없더라”며 “촬영기자도 저도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지진 발생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피해 지역에 경찰과 군인들이 많아지면서 취재를 제한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튀르키예 정부가 피해 상황이 그대로 보도되는 데 부담을 느낀다, ‘가짜뉴스’가 삽시간에 퍼져서 그렇다 등 파악된 원인은 제각각이었지만 총을 든 군인들이 텐트촌을 취재하는 기자들에 ‘프레스 카드’를 요구하거나 취재 허가를 받았는지 물으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경우들이 생겨났다. 지난달 9일부터 일주일간 현장을 취재했던 김서영 경향신문 기자는 “사실 현지에서 국내 기자들끼리 현지 상황이나 도로 상황, 위험 상황을 서로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챙기면서 다녔다”며 “저 포함 4명 정도 있는 ‘단톡방’을 만들고 그 방에 안 들어와 있는 타사 기자들과도 연락을 하면서 도움을 주고받았다. 앞으로 대규모 해외 취재가 있을 땐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돕는 (시스템이) 마련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유가족과 이재민들은 ‘형제의 나라’에서 온 한국 기자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며 함께 사진을 찍고 간식을 나눠줬다. 김서영 기자는 “취재 수첩이나 카메라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웃어주는 분들이 많았다”며 “사실 예상을 못했던 반응이었다. 한국에서도 이재민, 유가족 취재는 좀 어렵고 그래서 상당한 각오를 했는데, 막상 가니 저희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먹을 것을 주면서 반겨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주간 온갖 고생을 했지만 기자들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곽소영 기자는 “일주일간 온 진심을 다해 취재했지만 저는 결국 안온한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방인의 입장이었고, 여기 있는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는 걸 느꼈다”며 “사실 현지 운전기사 분이 이재민이었는데 모든 취재가 끝난 날 저는 호텔로, 일주일간 저와 동고동락한 기사님은 텐트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에 갑자기 괴리감이 느껴지더라. 그 분은 현지에서 계속 지진의 여파를 느끼면서 사시는데 저는 일상으로 복귀했으니 그런 데서 오는 일종의 자괴감과 자책감이 좀 있었다”고 말했다.
언론사들은 현재 여러 참상을 목격한 기자들을 위해 트라우마 치료와 관리를 안내하고 있다. 곽 기자는 “한국에 와서 일주일 좀 안 되는 기간 동안은 낡은 빌딩들을 보면서 지진이 나면 바로 무너지겠다, 튀르키예서 봤던 무너진 빌딩들과 오버랩이 되더라”며 “이태원 참사 취재도 제가 했었는데 이후 받던 트라우마 치료를 그대로 연장해 받기로 했고, 회사에서도 치료 권유를 많이 해주셨다”고 말했다. 김서영 기자도 “귀국하자마자 상담센터 연결에 대한 안내가 왔고 한 번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예약을 잡아놨다”며 “그 결과도 숨기지 않고 사내에 공유할 생각이다. 제가 받아야 저와 같이 간 후배 기자도 받을 거고 다음에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제도는 적극 이용하고 널리 알릴 생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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