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전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 있는 부영그룹 본사 앞. ‘언론 정신 훼손하는 부영은 각성하라’는 플래카드가 들어섰다. 인천일보 구성원들이 대주주인 부영그룹을 향해 내건 문구다. 전국언론노조 인천일보지부는 이날부터 앞으로 한 달간 매주 금요일 여기서 피켓시위를 연다. 첫날 손팻말을 든 이들은 싸늘한 한겨울 날씨에도 2시간 동안 자리를 지켰다. 지금 이들은 왜 대주주를 규탄하며 거리로 나선 걸까.
사태는 지난달 초 대표이사가 교체되면서 촉발했다. 지난달 4일 당시 김영환 인천일보 대표는 재임명된 지 8개월 만에, 임기 2년여를 남기고 돌연 자리에서 물러났다. 엿새 뒤 대주주인 부영주택은 민선 6기 유정복 시장 때 인천시 대변인을 지낸 박현수씨를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했다. 유정복 시장은 지난해 민선 8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대표이사 내정 직후 언론노조 인천일보지부와 한국기자협회 인천일보지회는 각각 비판 성명을 냈다. 인천시장의 측근 인사가 인천일보 대표이사에 오르는 일이 세 번째였기 때문이다. 내부 반발에도 박현수 내정자는 지난달 26일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거쳐 인천일보 새 대표로 공식 취임했다.
앞서 지난 2015~2019년 재임한 황보은 전 인천일보 대표이사는 2014년 민선 4기 유정복 인천시장 후보 선거캠프에서 특보를 지냈다. 당시 유정복 후보가 당선돼 4년간 시정 활동을 하는 내내 황 전 대표도 인천일보에 몸담았다. 2017년 인천일보 지분 49.87%를 인수해 대주주가 된 부영주택은 이듬해 민선 7기에 박남춘 시장이 당선되자 그의 선거캠프에서 공보단장을 지낸 김영환 전 한겨레신문 인천주재 기자를 2019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인천일보 구성원들은 대주주가 인천시장 측근 인사를 대표이사로 세우는 주요 배경으로 ‘송도테마파크 사업’을 지목한다. 부영주택은 2015년 인천시 연수구 일원 토지 약 104만㎡(31만평)를 사들여 테마파크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개발 예정지에 쓰레기·폐기물이 매립돼있고 토양 오염도 심해 사업이 연기된 상태다. 그사이 인천 연수구가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지만, 부영주택은 이행하지 않았고 법적 다툼 끝에 지난해 11월 패소했다.
기자협회 인천일보지회는 지난달 11일 성명에서 “박현수 전 인천시 대변인을 (신임 대표로) 전격 발탁한 것은 부영그룹이 인천에서 추진 중인 송도테마파크 개발사업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유정복 현 시장 최측근을 이용해 그룹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이끌어보겠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 부영그룹은 앞서 전임자인 김영환 전 대표이사 때도 이런 전략을 구사했다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인천일보 구성원들은 참담함과 좌절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A 기자는 지역에서 ‘인천일보 사장은 정치권 인사’라는 프레임이 생겼다고 했다. A 기자는 “사장 바뀌면 또 정치권에서 오는 거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일선기자로서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곤란하다”며 “이번에 급작스럽게 진행된 새 사장 선임 과정에서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더 이상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고 인천일보에 조금 더 밝은 미래가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노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B 기자도 “시장과 집권 정당이 바뀌면 그에 맞춰 사장도 바뀌는 언론사라는 인식이 지역사회에 공공연하게 퍼져있다는 것 자체가 창피하고 화난다”며 “저희가 대주주 부영에게 바라는 건 최소한의 존중이다. 덜 창피하고 조금은 뿌듯한 언론사를 만들 수 있게 사주와 구성원들이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는 대주주와 대화할 창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천일보를 더 좋은 언론사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다. C 기자는 “언론사에서 사주와 구성원들의 긴장 관계는 항상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주를 향해 목소리를 내면서 언론사의 가치를 지켜가는 과정은 불가피하다”며 “이번에도 되풀이된 사장 인사 문제가 더는 반복돼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으로 피켓을 들었다”고 말했다.
노조 차원에선 임원추천위원회를 도입해 대표이사 선임에 구성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방안을 요구하고 있다. 최남춘 전국언론노조 인천일보지부장은 “일련의 사태는 논란이 된 사장들 개인이 아니라 이를 결정한 대주주 부영의 문제라고 본다”며 “특히 전임 사장을 교체하고 새 사장을 세우는 방식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최 지부장은 “언론사의 힘은 신뢰에서 온다. 실제로는 꼭 그렇지 않더라도 정치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는 인식이 인천일보의 신뢰를 깎는다”며 “대주주와 대화하고 싶어서 (본사 앞 집회로) 찾아왔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흔들릴 수 있는 구조를 깨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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