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이상덕 매일경제신문 실리콘밸리특파원

이상덕 매일경제신문 실리콘밸리특파원

“가슴이 말을 걸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이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짓이다. 키치(Kitsch)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맹목적 이미지만 신봉하는 태도를 나쁜 예술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인 ‘키치’에 빗대 조롱했다. 사람의 평균 수명을 76년으로 봤을 때 그 시간은 4000주에 불과하다. 즐거움이 많지만 고통도 따른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 어우러진 것이 삶이다. 그래서 사람은 짧디짧은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깊은 고뇌와 성찰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삶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실리콘밸리는 경쾌하지만 때론 무거운 곳이다. 이곳의 혁신가들은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올원팜’이라는 공동체에서 살면서 사과 농사를 지었다. 선승인 코분치노 오토가와를 만나 선불교에 입문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스티브 잡스는 훗날 “하던 일을 그만두고 출가를 하려고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애플의 제품이 단순, 파격, 직관이라는 키워드가 관통돼 있는 이유다.


구글의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자유와 각성을 위한 축제인 ‘버닝맨(Burning Man)’에 심취했다. 네바다주 블랙록 사막, 허허벌판인 이곳엔 매년 8월 수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다. 버닝맨에서 돈은 쓸 수 없다. 콜라 한 병을 사려고 해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바꿔야한다. 이곳에선 창조가 곧 돈이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구글의 CEO를 선발하는 인터뷰 자리에서 버닝맨의 팬이었던 에릭 슈미트를 발탁한 이유다. 셋은 버닝맨을 통해 창조의 중요성이라는 깊은 연대감을 공유했다.


진정한 혁신가들의 삶은 이처럼 무겁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들을 추종하거나 또 누군가는 이들을 모방한다. 시류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세상은 투기와 광기, 공포와 절망이 맞물리며 돌아간다.


하지만 되새김질 없이 무엇인가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무조건적인 찬성과 무조건적인 반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극단(極端)이 등장한다. 크게는 인종차별주의자가 벌인 애틀랜타 총격사건이나 작게는 경기가 위축될 것이라는 공포감에 이뤄지는 대대적인 빅테크의 해고 같은 것들이다.


이성적으로 깊은 생각 없이 무엇인가에 맹렬히 달려들면서 나타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들이다.


실리콘밸리는 기업가치가 수백·수천조원에 달하는 빅테크 회사들을 잉태한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도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매우 철학적인 장소다. 특히 오늘날처럼 극단의 시대에는 스토아학파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주창한 삶을 따르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스토아학파는 맹목적 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정념인 파토스(pathos)를 버리고 초연한 마음인 아파테이아(apatheia)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스토아적 삶을 사는 워런 버핏이 유가 폭락기 때 석유기업 옥시덴털 페트롤리엄 주식을 매집한 뒤 “나는 화석연료에 대해 현실주의자”라면서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약간 미쳐 있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또 트위터의 창업자인 잭 도시는 매일 8㎞를 걸어 출근하고 1년에 열흘간 묵언 명상을 하면서 스토아 철학에 빠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존주의 철학은 삶을 도구로만 다루려는 이곳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평균수명을 76세로 볼 때 인생은 단 4000주에 불과한 시간이기 때문에 도구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삶 그 자체를 목적으로 대하고 현실을 의미하고 진정으로 즐기라”는 윌리엄 버크먼의 발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커지는 전쟁의 공포와 경기 침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정치 질서 혼란기에 필요한 것은 먼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벗어내고 주어진 유한한 삶을 깊이 생각해보는 이성적인 성찰이다.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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