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지구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선거’라고 표현한 브라질 대선이 결국 좌파 후보 룰라 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이 신문이 말한 것은 기후변화와 식량안보, 빈곤 퇴치 등 글로벌 의제와 관련한 브라질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룰라는 10월2일 1차 투표에서 48.4%(5720만표)를 얻어 43.2%(5107만표)에 그친 현 대통령 보우소나루를 600만표가량 앞섰다. 1차 투표에서 룰라가 과반 득표에 성공해 당선을 확정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우파 결집으로 보우소나루가 예상보다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승부는 10월30일 결선투표로 넘겨졌다. 결선투표에선 룰라가 50.9%를 득표해 49.1%를 얻은 보우소나루를 눌렀다. 1.8%포인트(214만표) 차이 박빙이었다.
이로써 룰라는 2002~2005년과 2006~ 2010년에 이어 세 번째 집권하게 됐다. 브라질에서 군부독재가 끝나고 1980년대 중반에 민주주의가 회복된 이후 세 번째로 대통령을 역임하는 것은 그가 처음이다. 반면에 2018년 대선에서 ‘극우 돌풍’을 일으켰던 보우소나루는 민주화 이후 재선에 성공하지 못한 첫 번째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뿐만 아니라 4년간의 재임 시절에 제기된 직권 남용과 비리 의혹 등과 관련해 사법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룰라는 대선 직전 연설에서 자신이 대선에서 승리하면 좌파 노동자당 정부가 아니라 ‘국민의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새 정부는 노동자당 정부가 되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당을 넘어서는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선 승리가 확정된 뒤에는 “더는 2개의 브라질은 없다. 이제는 총을 내려놓고 대화를 해야 할 때”라며 향후 정국 운영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극우 보우소나루의 독단적 행태에 질렸던 국제사회는 룰라의 귀환을 환영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정상들은 앞다퉈 그의 승리를 축하했고 적극적 협력을 약속했다. 보우소나루 집권 기간 국제사회에서 ‘왕따’가 됐던 브라질이 주요 글로벌 플레이어로 복귀하는 순간이다.
결선투표를 앞두고 77번째 생일을 지낸 룰라는 대선 승리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았지만, 그의 앞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가 두 차례 대통령을 역임한 2002~2010년은 브라질이 글로벌 경제 호황에 편승해 높은 성장을 구가하던 시기다. 2010년 퇴임 당시 지지율이 80%를 넘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맞이할 상황은 과거와 다르다. 글로벌 경제 침체 우려 속에 브라질은 생산성 저하와 투자 부족, 내수 위축으로 성장동력을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늘어난 지출로 재정에도 여력이 없는 상태다. 브라질 경제가 중장기적으로 성장세를 유지하려면 재정 건전성 확보뿐 아니라 생산성을 높이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새 정부가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주력하고 생산성을 높이지 않을 경우 성장률이 2%를 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시장과 언론은 룰라의 새 정부가 어떻게 꾸려질지 주목하고 있다. 폭넓은 전문가들로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가운데 룰라는 노동자당 인사의 새 정부 참여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전문가 그룹을 과감하게 기용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금융시장도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국정 운영의 축으로 삼겠다는 그에게 일단은 신뢰를 보내고 있다.
룰라가 대선에서는 승리했으나 신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지는 않았다. 대통령 못지않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지사 선거에서는 전국 27개 주를 11개 정당이 나눠 가졌다. 연방 상-하원은 우파와 중도 정당들이 다수 세력을 형성했다. 이는 룰라와 의회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벌써부터 새 정부 대통령실과 의회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예상이 나온다. 그럼에도 룰라의 ‘개인기’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타고난 말솜씨와 뛰어난 협상력에서 나오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성공적인 집권 경험을 가진 룰라가 나락으로 떨어진 브라질을 구해낼 것이라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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