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위법 반대투쟁에 단락을 짓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면서 우리들의 광장인 기자협회 회보를 발간하게 되었다…과업 달성의 매개체로서 역할을 기대한다. 회보를 통하여 소원한 거리의 압축 및 분산된 의견의 집약으로 영광스러운 회보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강현 초대 한국기자협회 회장은 기자협회보 창간호를 발행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기자협회보가 10일 창간 58년을 맞는다. 1964년 8월17일 한국기자협회 창립 3개월 후인 11월10일 세상에 나온 기자협회보는 “언론계 전반에 걸친 기록자요, 비판자요, 공동의 광장이요, 기자의 거울로서 자라왔다(한국기자협회 10년사). 언론 속의 언론, 한국 언론의 기록자, 언론 전문지, 미디어 비평지로 불렸다(한국기자협회 50년사).”
기자협회는 창립 직후 중고 등사판으로 유인물을 만들어 회원과 소통했다. 협회 활동과 언론계 소식을 전파하는 데 한계를 절감한 기자협회 집행부는 기관지 창간 작업에 착수했다. 초기엔 편집 전담 기구가 없어 기자협회 조사분과위원회에 참여하는 기자들이 회사 일을 보는 틈틈이 매달 대판 4면의 협회보를 제작했다.
기자협회보 편집 방향은 언론인 자질 향상, 언론자유 수호, 언론인 권익 옹호, 국제 교류 등 기자협회 4대 강령(지금은 평화통일이 추가된 5대 강령)이 축이었다. 초기엔 재정상 문제와 편집 진용의 부재로 협회보를 내지 못하거나 발행일자를 넘기기도 했다. 편집실(지금의 편집국)이 신설된 것은 1968년 6월, 그해 8월3일자(40호)부터 주간시대를 맞았다.
기자협회보는 시대별 현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1970년대에는 전국 일선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의 교량 역할을 하고 1980년에는 비상계엄 해제, 사전검열 철폐 운동을 펼쳤다. 불의의 시대에 맞서다 기자협회보는 1973년 월간 발행을 강제당하고, 1975년과 1980년 두 차례 강제 폐간되는 수난을 겪었다.
반면 “실어증에 걸린 무기력한 모습으로 친목 도모와 권익 옹호에 치우친 지면제작도 있었다(한국기자협회 50년사).” 5공화국 시절이었다. 기자협회보 사설 격인 ‘우리의 주장’이 4년간 지면에서 사라졌고 1982년과 1983년 1년간 문화공보부 장관의 글 4건이 실렸다. 전두환 대통령의 사진과 기사도 1면에 게재됐다.
기자협회보는 일선기자들로 구성된 ‘편집위원회’가 있다. 편집위원회는 협회보 편집 방침에 관한 최종 결정권을 갖는 상설기구로 1969년 4월 구성됐다. 언론계 안팎의 압력과 입김, 기자협회 내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제도적 장치로 53년째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기자협회보를 비롯한 모든 기자협회 간행물은 어떤 압력도 배제하고 가장 양심적인 태도로 제작해야 한다”는 내용을 기자협회 운영 규정에 명시했다.
기자협회보 기사가 디지털에 등장한 건 1993년이었다. 그해 9월 PC통신망 하이텔에 ‘언론광장(PRESS)’을 개설하고 주요 기사를 서비스했다. 1999년 5월 개통한 기자협회 홈페이지 대문은 협회 활동이 주를 차지했다. 기사를 보려면 ‘기자협회보’ 메뉴를 클릭해 들어가야 했다. 2005년 11월부터 홈페이지 대문을 기자협회보 기사로 편집하는 시스템을 갖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해 1월부터 기자협회보 기사를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에 공급했으며, 2020년 4월 네이버 모바일 뉴스 채널에 입점했다.
기자협회보는 지령 100호(1969년 10월3일), 1000호(1999년 5월10일), 2000호(2020년 9월23일) 발행의 발자취를 따라 언론계 내부의 자기성찰과 기자사회의 목소리를 오롯이 담아내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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