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쌓이면 올라가는 '연공임금'의 성벽

[이슈 인사이드 | 노동] 전혜원 시사IN 기자

전혜원 시사IN 기자

직무, 곧 하는 일에 따라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꽤나 미심쩍은 혹은 적대적인 반응을 맞닥뜨린다. 직무 가치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 자본가나 관리자 마음대로 하려는 거냐, 개개인의 경쟁이 심화된다 등.


기업들이나 정부가 의도적으로 뒤섞지만, 직무급과 성과급은 다르다. 개인이나 집단의 ‘성과’를 평가해 기본급을 정한다면 성과급이다. 반면 해당 ‘직무’에 필요한 숙련에 따라 기본급을 정하는 게 직무급이다. 이때 직무에 요구되는 숙련을 사측이 일방적으로 정하진 않는다. 독일 등 유럽에서는 개별 기업을 넘어선 산업별 노동조합과 산업별 사용자 단체가 임금을 협상한다.


한국은 노동조합이 기업별로 쪼개져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들었으나 임금은 기업별로 정한다. 그런데 산업별 노동조합은 산업 내 임금 평준화를 위해 만든 것이다. 기업이 달라도 같은 산업에 종사한다면 같은 기준에 따라 임금을 받도록 하는 게 산업별 노조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무엇을 위해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들겠는가?


바로 이 산업별 임금체계의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가 논의의 핵심이다. 호봉제로 대표되는 지금의 연공임금, 즉 연차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는 체계는 사회적 기준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연공임금은 장기근속을 해야 의미가 있는 개념인데, 근속연수가 짧은 중소기업 노동자나 계약직·파견직 등에게는 연공임금을 적용하기 어렵다. ‘근속’이 보상을 좌우하는 주된 원리인 한, 성평등한 임금체계가 되기도 쉽지 않다. 시사IN은 최근 2553개 기업 남녀 임금격차를 분석했다. 유수한 대기업들이 자사 남녀 임금격차 원인 중 하나로 육아휴직을 꼽았다.


지금도 금속산업 노사는 산업별 최저임금을 정하지만 법정 최저임금과 큰 차이가 없다. 중소기업의 지속성과 지불능력을 고려할 때, 각 산업의 정점에 있는 업체의 호봉을 모두에게 적용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언론산업의 격차 해소를 (가장 연봉이 높다고 알려진) SBS 정규직 수준으로 맞추는 게 과연 성취할 수 있는 목표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대기업 기자와 중소기업 기자, 정규직 PD와 계약직·프리랜서 PD의 직무에 따른 임금을 맞춰가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


산업별 임금체계보다는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저임금은 미숙련 노동자에게도 적용해야 할 최저선이다. 어느 정도 숙련을 지닌 노동자 사이의 임금 형평성도 필요하다.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해 연공임금을 주자는 주장이 공공부문 정규직화에서 어떤 파열음을 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성벽 안으로 소수를 밀어넣는 것만으로 격차가 해소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성벽 안팎을 관통하는 임금의 규칙이다. 연공임금 자체가 고용을 비정규화·외부화하는 유인이라는 연구결과를 고려하면 더더욱 시급한 과제다.


“산업 전체에 적용되는 기업횡단적 표준임금을 설정하지 못했다.” 2007년 민주노총이 펴낸 ‘산별노조시대, 고용·임금·복지의 연대전략’의 한 대목이다. 그로부터 15년 가까이 흐르는 사이 성벽은 더 드높아졌고, 평등은 성벽 안에 머물렀다. 이번 정의당 당대표 선거를 계기로 진보 내부에서 임금체계 논쟁이 비로소 시작된 듯하다. ‘금기시되어온 중요한 갈등’을 호명하고 대표하는 노동정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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