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9일 호주의 인터넷 신문 크라이키(Crikey)는 ‘트럼프는 불안정한 반역자이고 머독은 불기소된 그의 공모자’(Trump is a confirmed unhinged traitor. And Murdoch is his unindicted co-conspirator)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크라이키 정치부장이자 기사를 작성한 버나드 킨(Bernard Keane)은 글로벌 미디어 거물 머독이 폭스뉴스를 이용해 2021년 1월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을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기사가 나간 후, 뉴스 코프의 공동 회장인 라클란 머독은 이 기사가 증거 없는 혐의를 제기함으로써 머독의 명예를 훼손했음을 주장하며, 8월23일 크라이키 소유주인 프라이비트 미디어(Private Media)를 상대로 호주 연방법원에 명예훼손 소장을 제출했다. 머독 측은 크라이키에 수차례 사과와 기사 철회를 요구했으나 크라이키는 이를 계속 거부했으며, 공개서한을 통해 ‘영장을 기다린다’는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크라이키는 8월22일 뉴욕타임스 광고란에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공개서한을 싣기도 하였으며, 크라우드펀딩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소송 대응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운동에 돌입했다. 소송에 필요한 비용 300만 호주달러(약 26억8000만원)를 목표로 시작한 이 모금운동은 현재 50만7000달러(약 4억4000만원)에 이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를 국회의사당 난입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는 가운데, 보수성향의 폭스뉴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 또한 여러 기사를 통해 제기된 바 있다. 그렇지만 미국의 어느 언론사나 언론인도 이러한 주장에 머독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머독은 왜 유독 호주에서 명예훼손을 제기하였을까? 이는 엄격한 호주의 명예훼손법과 관련이 있다. 지난 몇 년 유명인, 정치인들의 명예훼손 소송이 잇따랐는데 대부분의 판결이 명예훼손을 제소한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의 경우 명예훼손을 제소한 측에서 해당 언론사측 해당 사안이 거짓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바로 이로 인해 미국의 정치인들이 명예훼손을 제소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 호주의 명예훼손법에 따르면 명예훼손 제소를 당한 언론사측이 보도의 합리성을 입증해야 면책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호주에서는 언론인을 보호하기 위한 언론자유 보장이라는 기본적인 법적 장치가 없다. 최근 명예훼손법이 언론인들의 알 권리와 저널리즘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어오고 있다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법 개정에 대한 지속적인 사회적 요구가 있었다. 이에 따라 2021년 명예훼손법은 언론인을 보호하기 위한 몇몇 장치들을 도입하였는데, 그 중 공익방어(public interest defence) 조항이 추가되어 명예훼손 소송 사안이 공익을 위한 내용이라면 면책 사유가 될 여지를 주고 있다. 따라서 크라이키 기사가 다루고 있는 미국 국회의사당 폭동 사태에서 폭스뉴스의 역할이 공익 이슈인가는 매우 중요한 쟁점일 수밖에 없다. 이 사안이 공익 이슈로 판단되며, 새로 개정된 법안이 개정 목적에 맞게 언론인들의 보호 장치로서의 역할을 할 것인지 제대로 시험해볼 기회가 되는 셈이다. 또한 새로 개정된 명예훼손법에 따르면, 머독측은 크라이키 기사가 머독의 명예에 중대한 손해를 입혔거나 입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는 제1조 중한 손해(serious harm)에 관한 조항에 의거한 것으로 이번 개정된 법안에 새로 도입되었다.
호주 언론들은 이번 머독과 크라이키의 소송 전쟁을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 비유한다. 호주의 전 총리 케빈러드와 말콤 턴불은 공개적으로 머독의 명예훼손 제소를 강도 높게 비난하며, 크라이키의 모금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케빈 러드 전 총리는 2020년 머독의 뉴스코프의 호주 미디어 시장 장악에 대한 특별조사를 요구하는 호주 국민청원을 주도한 정치인이다. 이번 머독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공익방어’ 논리가 통할지 큰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언론인을 보호하기 위해 개정된 법적 장치의 역할에 대한 첫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여론이다. 재판은 내년 3월 말 진행하기로 예정됐다. 앞으로 몇 개월간 호주 사회에서 이번 사안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전개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지영 호주 캔버라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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