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가 앞섰다.”
국정감사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반지하 전수조사 방침을 후퇴시켜 번복해 발표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지난 8월 기록적인 폭우로 반지하 주택에서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뒤 일주일 만에 내놓은 대책에서 서울시는 20만호에 달하는 서울 내 반지하 가구를 전수조사해 임대주택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주거 상향 로드맵을 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5일 서울시는 1102가구+α 수준의 표본조사로 계획을 변경했다. 오 시장은 전수조사는 인력이나 예산상 한계가 있고, 통계청도 표본조사를 하지 않냐고 덧붙였다.
오 시장의 말도 맞다. 장애인이나 고령가구 등 대책이 더 시급한 가구만 콕 찍어서 먼저 조사를 하고, 그 뒤 일반 가구는 표본조사로 탑다운식의 정책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오 시장이 놓친 건 애초에 전수조사를 하겠다고 앞선 의지를 보여야만 했던 그 “절박함”이다. 반지하의 열악한 주거환경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장 사람 사는 곳이 물에 잠겨 참사로 이어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그 당연한 절박함 말이다.
서울 내 20만 반지하 가구 전부가 침수 위험에 놓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침수 이력이 있거나 침수가 우려되는 반지하 가구에 대해서는 침수판 설치 등 ‘당장을 위한’ 선제적인 대책이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예산과 인력을 따지기 전에 움직여야 하는 일도 있지 않은가.
정부는 필요한 데이터는 모두 갖고 있다. 이 중 일반 대중도 접근 가능한 데이터로 몇 가구나 내년 장마철에도 마음을 졸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하는지 확인해봤다.
환경부는 하천 범람에 의해 침수가 될 수도 있는 지역을 보여주는 하천범람지도를 공개하고 있다. 과거 침수 여부와 지형 등 기초조사를 기반으로 침수가 예상되는 지역을 보여주는데, 올해와 같이 기록적인 폭우 상황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빗물펌프장과 같은 우수배제시설의 용량 초과에 따른 침수는 빠져있어 가장 “최소한”의 침수예상지역을 보여주는 지도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신림동에서 숨진 세 모녀 집은 이 지도가 보여주는 위험지역에서 빠져있다.
국토교통부가 운영하는 세움터에서 제공하는 건축물대장 데이터로는 서울 내 지하층이면서 주거용으로 등록되어있는 18만9290가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지도 위에 점으로 나타내면 반지하 지도가 된다.
하천범람지도와 반지하지도. 이 두 지도를 겹쳐보면 정부가 제공하는 데이터에 의해 “공식적으로 그리고 매우 보수적으로” 침수위험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2만5931가구를 확인할 수 있다. 최소공배수만 따진 건 데도 전체 반지하 가구의 13.6% 정도다. 한 가구에 2명씩 산다고 하면 서울시에서만 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장 편안해야 할 공간에서 생존을 걱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2만5931가구 앞에 5만명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침수판을 설치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오 시장이 앞세웠다 평가한 그 의지가 폭우 뒤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보여주기식’이 아니었다면, 다시 한 번 그 의지는 앞세울 필요가 있다. 내년에도 어김없이, 장마철은 돌아오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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