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품처럼 사용되다가 어느날 갑자기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교체됩니다.”, “법원에서 근로자 지위가 인정된 후 정규직 노동조합에 찾아가 노조 가입 절차를 문의했더니 우리는 아직 ‘프리랜서’라서 가입이 안 된다고 거절당했어요.”, “(비정규직들이 법률 대응에서 승소하는 사례가 생겨서인지) 갑자기 멀쩡히 출근하던 회사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라더군요. 괴롭혀서 내보낼 생각일까요?”
며칠 전 국회에서 열린 ‘방송 비정규직’ 토론회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무려 6명에 이르는 현장 노동자들이 ‘증언’을 위해 참석한 것. 토론자로 참석했던 필자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현장의 목소리들을 들으며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3~4년 전 개최되었던 파견법 철폐 포럼에서 당시 급증하던 방송사 파견 노동자들을 ‘증언자’로 참석시키기 위해 애썼으나 누구도 나서지 못했던 기억이다.
소위 ‘바닥’이 매우 좁고 한번 ‘찍히면’ 생계가 위협당할 수도 있는 방송계에서 부당하거나 불합리한 현실을 직접 알리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증언에 나선 다수의 방송 제작 현장 노동자들은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당사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출발점에는 최근 1~2년간 이어진 방송계 ‘무늬만 프리랜서’에 대한 법원, 노동위원회 등의 근로자성 인정 사건 등이 존재한다. ‘최초의 인정’ 사례를 따라 수많은 비정규직들이 각지에서 법적 대응에 나섰고 국회와 고용노동부 등도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에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2017년 故 이한빛 PD의 죽음 이후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 현실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회자된 듯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열리는 토론회에서 언급되는 현장의 단면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노동자를 갈아 넣어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상시적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방송 제작 현장의 비정상적 운용 구조는 견고하기만 하다.
방송 바닥의 노동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방송사들이 수십 년간 제작비 절감 등을 위해 비정규직을 ‘남용’함으로써 스스로 구축한 왜곡된 고용 구조에 대해 여전히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멍가게라도 기본적으로 인력 고용 및 관리 계획을 세우지만 지상파 방송사들은 노동자들의 ‘승소’에 대한 편법적인 대책 마련에만 급급하다.
방송사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무책임하다. ‘언론사’이지만 방송 비정규직을 둘러싼 뉴스를 전혀 보도하지 않는다. 방송사 스스로 제 얼굴에 침 뱉기를 할 수 없겠지만 방송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시청자들에게 최소한의 정보도 전달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방송사 내부에 만연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은 더욱 꼭꼭 숨겨진다. 신문 역시 일부 매체를 제외하고 같은 언론인 방송사 내부의 민낯을 알리는 데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을 알기에 공식적인 토론회에 ‘당사자들’이 등장해 목소리를 높인 장면은 매우 남다르게 다가온다. 정작 언론은 철저하게 내부의 현실을 외면했지만 이제 그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에 이어질 ‘행동’에 함께 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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