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추운 나날 지나고 새싹 돋아날 무렵, 봄날의 햇살이 주는 따스함보다 기록적인 산불 소식이 더 익숙하다. 이번 여름엔 평년보다 훨씬 더 일찍 찾아온 열대야 그리고 평년보다 훨씬 늦은 장마가 있었다. 그렇게 수도권엔 을축년 대홍수에 버금가는 큰 홍수가 났다. 그다음은 태풍이다. 악명 높은 루사, 매미보다도 더 큰 위력을 가진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에 닥쳤다.
자연재난이 닥칠 때마다 온종일 방송 뉴스를 가득 메우고, 일간지 헤드라인까지 가득 채운다. 그러나 대부분 보도에선 근본 해결책에 대한 접근이 없어 다소 공허함을 남긴다. 뉴스는 다소 근시안인 원인에 집중한다. 산불에선 발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추적하기에 여념이 없고, 무더위나 가뭄엔 기단의 움직임이 이래서였다며 기상학적 원인만 밝힌다. 홍수가 나니 잘 갖춰지지 않은 배수 시스템이 원흉이라고 지적하기 일쑤다.
기후 재난이라는 추리극에서 형사역을 맡은 언론이 주변 증거들에 집중하기 바빠 스모킹건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를 통해 과학자들이 말했듯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는 더 강하고,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근본적 원인에 가 닿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몇십 년간 날로 진화하는 각종 자연재해를 마주해야 한다.
스모킹건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바로 기후변화를 가속하는 인류의 온실가스 배출이다. 2021년 우리나라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 중 발전과 산업 등 정부와 기업의 몫은 3분의 2가량이다. 수송, 농업, 폐기물 등 나머지 부문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마저도 정부와 기업과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과학자들의 말마따나 우리가 겪는 자연재해의 원인은 온실가스다. 결국 우리가 기록적인 산불, 홍수, 태풍을 겪을 때 정부와 기업에 그 책임을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최근 단기적으로 석탄발전을 늘려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최근 2030년까지 석탄발전 비중을 20% 이상 가져가겠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해외 주요 기업들이 일찍이 RE100(소비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기업간 캠페인)을 선언하거나 달성한 가운데 주요 기업들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물론 정부와 기업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탄소중립으로의 길은 피곤하고 돈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한 적 없는 연이은 자연재단으로 초래할 피해의 대가와 비교하면 탈탄소로 가는 부담과 비용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사실을 정부와 기업에 알려줄 강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힌남노 북상에 앞서 지난 4일 기상청 브리핑에서 예보분석관이 루사, 매미 등 과거 주요 태풍들이 남긴 사망자, 이재민, 재산피해 등이 담긴 통계를 띄우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보여 드리는 이 숫자들 하나하나에 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회한이 담겨 있습니다. 이 슬픔과 회한이 다시 찾아오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앞날의 슬픔과 회한까지도 최소화할 ‘철저한 대비’가 더 큰 의미에서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시민들과 함께 ‘철저한 대비’에 동참할 수 있도록 언론의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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