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쌀이 발효되는 모습, 암실 속 사진 나타날 때처럼 닭살 돋았죠"
[기자 그 후] (40) 이혜인 '호랑이배꼽' 막걸리 밝은세상영농조합 대표 (전 스포츠서울닷컴 기자)
경기 평택시 희곡리. 평택역에서 차로 40분 거리 조용한 마을에 이르면 숲에 안긴 듯 위치한 집 세 채가 나타난다. 넓은 마당 안쪽엔 노랑색 문이 인상적인 흙담집과 ‘힙’한 카페 같아 보이는 건물이 ‘ㄱ’모양으로 배치됐다. 이 건물들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붉은 지붕의 한옥이 보인다. 그 옆 노란색 글씨로 ‘호랑이배꼽’이라 적힌 표지판을 뒤로 한 채 양조장 문을 열며 이혜인 밝은세상영농조합 대표가 일요일이던 지난 7일 말했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온다는 게 좀 늦어졌어요. 주 4일만 일하는 게 인생의 목표였는데, 아빠가 그때 ‘술은 해놓고 놀러갔다 와도 되고 술렁술렁 하면 된다’고 저를 꼬드기는 거예요. ‘4일은 일하고 3일은 날 위해 뭘 하면 알차겠다’ 잘못된 생각을 해서 그 뒤로 주 7일을 일했어요.(웃음)”
“체질상 곡주가 좀 맞고” “회사 다닐 때도 술을 너무너무 많이 먹긴 했지만” 20년 전 ‘너 나중에 양조장 대표 될 거다’ 했다면 믿었을 리 없다. 1980년생인 그는 사진기자였다. 98학번으로 대학에서 사진, 구체적으론 ‘포토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졸업을 앞둔 2003년 말 연예스포츠지 스포츠서울의 자회사 스포츠서울닷컴(스포츠서울I&B) 인턴생활을 했고 2004년 정직원으로 전환돼 2~3년 간 기자로 지냈다. 매체 성격상 연예와 스포츠가 주요 콘텐츠였다. 언론계에선 온라인이 주요 화두이던 시점이다. “졸업 쯤 디지털카메라 보급이 확산됐고 그러면서 빨리 기회를 주고 기사를 평가해 바로 송출하는 달라진 시스템에서 일했는데 잘 맞았어요. 사진만 찍지 않고 글까지 쓰는 ‘포토 라이터’를 요구했는데 마음에 들었고, 팀 분위기도 좋아서 재미있게 일했어요. 제품판매엔 사진이 기본인데 이때 배운 걸 지금 잘 써먹네요(웃음).”
해외에서 활약 중인 스포츠스타들에 대한 관심이 높던 시기였다. 야구 ‘빅리거’ 취재를 위해 팀원 4명 중 3명이 미국에 직접 가 있을 정도였다. 혼자 한국에 남아 팀원들을 백업하며, 연예 분야 취재를 도맡게 됐다. “여자가 가면 비용이 두 배로 드니까 남게 됐는데 나는 계속 연예 사진만 찍겠구나 싶었어요. 유독 자살하는 여자 연예인이 많았던 상황에서 그런 취재가 건설적이진 않다는 생각도 했고요.” 회사에 퇴직의사를 밝혔고, 미국에 어학연수를 가기로 마음 먹었다. 마침 취재팀이 귀국하게 된 시기였고 회사는 ‘어차피 갈 거면 현지에서 사진을 보내주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이에 응하면서 회사는 퇴사 전 특파원 비자를 내줬고, 1년 간 그는 프리랜서 기자로 박찬호 선수를 취재했다. 당시 소속팀 연고지이던 텍사스에 터를 잡았고, 그가 샌디에고로 이적하면서 따라갔다.
귀국을 한 29살, 몇몇 곳에서 오퍼가 있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600년 평택 토박이’인 집안의 둘째 딸은 힘든 시기가 되니 “대자연을 마주해야겠다” 싶어져 부모님이 있던 평택으로 내려갔다. 영어강사를 하다 어학원 교수부장까지 맡게 되며 몇 년이 흘렀다. 앞서 2008년 아버지가 “술은 그 나라의, 지역의 철학”이란 생각으로 술을 만들었다. 2009년 판매를 시작했지만 거의 팔지 못하고 가족, 친지, 친구와 나눠먹은 참이었다. 2013년쯤부터 아버지를 간간이 돕던 이 대표는 2016년부턴 아예 전업으로 양조장을 맡게 된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 감정과 비슷했어요. 쌀이 발효되면 보글보글 하다 건들지도 않았는데 소용돌이를 만들 때가 있는데, 암실 용액 안에서 아무 것도 없던 종이에 갑자기 이미지가 나타날 때처럼 닭살이 돋았어요. 돈을 많이 벌겠다, 비전을 봤다가 아니라 ‘먹어보니 맛있는데 만들었으니 팔아야지’ 이런 거였어요.”
대를 이어 한다지만 가양주를 계승하고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다는 지역특산주 면허 제도가 생기며 가능했던 작은 양조장이다. ‘호랑이배꼽’ 자체가 호랑이 형상인 한반도의 배꼽 자리, 평택의 정체성을 담은 명칭이다. 프리미엄 생 막걸리 ‘호랑이배꼽’은 고두밥이 아니라 생쌀을 발효, 숙성시키는 와인 기법으로 빚어 가볍고 깔끔한 맛을 내지만 보통 막걸리 맛과 다르고 비싸다. “술만 있지 세팅된 게 없고 판로도 없었던 상황”에서 자매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찾아가는 양조장’ 사업에 지원, 선정돼 활로를 열었다. 화가인 아버지, 김치명인이자 도예가인 어머니, 의상디자이너인 언니 등 예술가 집안은 “집에 그림이 굴러다니고” “외국 친구가 20개국에서 버스를 타고 놀러와 아트 캠프를 하고, 집에 손님이 200명 와도 다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국악과 재즈공연, 각종 스토리를 소개하는 ‘문화가 있는 양조장’을 운영하며 많은 매체를 탔고 인지도를 높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객과 직접 만나자는 생각에서 막걸리를 직접 소매판매한다. 고가인 소주는 아예 거기 담긴 얘길 전할 수 있는 방문자에게만 판다. 술은 물론 술병 레이블과 캐릭터 제작, 각종 굿즈까지 모두 가족들이 만든다.
기자로 뜨거운 20대를 보냈다. 마흔 줄에 들어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술도가를 운영한다. 철저한 인생계획표를 따라 살기보다 그는 한 문이 닫혔을 때 열린 문을 찾고 그 길에서 찾은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해온 사람이다. “몇 월에 제품이 출시되고 계약을 하고 전 그렇게 얘길 못하겠더라고요.(웃음) 지금 생산·판매방식이 맞는지 기로에 서 있고, 대량생산으로 가야하나 고민은 많이 하죠. 다만 저는 장인은 아니고 시장 ‘최초’에 도전하는 창작자로 남을 수 있으면 돼요. 백년기업 생각도 전혀 없고 힘닿는 데까지 하다가 못하겠으면 그만할 거예요. 지금은 이걸 통해 결이 맞는 분을 만나 나누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재미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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