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의 주량은 얼마나 될까. 10여년 전 <삼국지>를 과학적으로 들여다 본 신간을 소개한 한 시사주간지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는 술을 마시고 곯아떨어져 부하에게 살해 당했다는 서술에 근거해 장비의 주량을 살피는 책 일부를 전한다. ‘8척’ 신장은 당대 한 척 20~30cm에 근거해 160~184cm로, 체중은 ‘장대한 기골’이란 설명에 따라 90kg으로 봤다. 50kg 성인에 4kg(3.8ℓ) 혈액이 있는 만큼 장비의 혈액량은 7.2kg(6.8ℓ)이었고, 혼수상태 혈중 알코올 농도를 0.5%로 볼 때 최대 34㎖ 알코올이 몸에 있었다. 장비가 마신 술은 발효주였을 텐데 시판 술로 치면 막걸리 16병 또는 맥주 20여병이 장비의 주량이라고 기사는 적는다.
술은 늘 술 이상이었다. 특히 술을 매개로 한 이야기들은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취하는 음료”(국어사전)를 액체 이상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였다. 유구하게 사람들의 관심과 일상, 삶에 관심 가져온 언론과 기자들에 술이 매력적인 소재였음은 당연지사다. 지금도 매일매일 쏟아지는 술 관련 뉴스들은 그 방증이다. 술 이야기에 남다른 관심과 각별한 조예를 지닌 전·현직 기자의 책을 소개한다. 와인과 버번 위스키, 맥주, 소주 등 술 종류별로 도서를 선정했고 신·구간을 아울렀다. 편의점에서 다양한 주류를 구할 수 있는 ‘취향의 시대’, 이들 책에서 술은 알코올이자 매개이며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내가 뭘 먹는지, 또 거기 담긴 스토리가 어떤지 알고 먹는 술맛은 좀 다를 듯하다.
◇최고의 ‘와인’ 안주...이야깃거리를 찾는다면
와인을 먹는 자리에서 꺼낼 이야기를 찾는 독자라면 지난 5월 출간된 책 <와인 콘서트>(더좋은책)를 참고할 만하다. 와인 관련 자격증 WSET, CIVB를 보유했고 매년 300병 이상 시음 노하우를 인정받아 전문가 평가단으로 활동해 온 김관웅 파이낸셜뉴스 편집국 부국장이 썼다. 저자는 “와인의 가장 좋은 점은 식사 자리나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라며 “(와인 테이블에서) 다양하고 깊은 대화”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취지대로 책은 와인의 맛·물리적 특성보다는 와인에 얽힌 흥미로운 역사, 문화, 경제를 쉽게 전하는 데 집중한다. ‘전쟁과 와인’, ‘와인에 취한 인류’, ‘와인의 경제학’, ‘궁금증으로 풀어보는 와인’ 등 목차당 13~16개 글은 각각 ‘이야깃거리’ 단위로 나뉘어 재료로 끌어오기 좋다. 예를 들어 포트와인을 깐(?) 자리라면 술 한 방울에 깃든 인류의 집착, 역사적 배경에 대해 이런 얘길 할 만하다. 포트와인은 백년전쟁으로 탄생했다. 와인 소비 대국이던 잉글랜드는 전쟁 패배 후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먹을 수 없었고 대체재로 포르투갈 항구도시 포르투(포트) 생산 와인을 찾았지만 먼 항해거리 탓에 와인이 상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포도 발효 중 방부제 역할을 하는 77도짜리 브랜디를 부어 독한 와인을 만든 것이다. 와인은 포도 당분이 효모를 만나 알코올을 내놓으며 만들어지는데 중간에 독한 술이 들어오니 효모는 죽고 분해할 당분은 남아 포트와인은 도수가 높고 단맛이 강하다.
‘경제’란 키워드로 와인을 보는 챕터 역시 흥미롭다. 책은 매년 4월 초 프랑스 보르도에서 열려 선구매를 진행하는 행사 ‘엉 프리뫼르’를 소개하며 와인경제의 일면을 보여준다. 참여 중개인들은 시음 후 계약금을 지불하는데 가격은 와인을 내놓는 와이너리도 모른다. 사실상 유명평론가가 정한 가격이 몇 달 후 통보되면 잔금을 입금하고 1년6개월~2년 후에야 물건을 받는 묘한 시장이다. 그 외 ‘보르도’와 ‘부르고뉴’ 같은 프랑스 대표 와인 생산지의 각 특성, 가짜 와인의 세계, 국가별 최고가 와인 스토리 등 ‘와인’과 관련해 늘상 화제가 되는 소재가 배치됐다. 참고로 책을 보고 나면 굳이 몇 천만원 짜리 와인에 목맬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와인 전문가인 저자의 추천이 책 곳곳에 있기에 참고해도 되겠다. 무엇보다 술자리 최고의 안주는 늘 이야기일 텐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최고의 안주를 제공한다.
◇‘버번 위스키’ 여행을 따라가다 넓은 술의 세계로
버번 위스키는 옥수수를 주재료로 호밀(밀), 맥아보리를 배합한 증류주다. 병입 도수 40도 이상이며 스카치위스키와 달리 무조건 불에 그을린 새 오크통에 숙성해야 하고 첨가물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 등을 충족한 미국 위스키의 하위 부류다. 2020년 5월 출간된 책 <버번 위스키의 모든 것>(싱긋)은 이렇듯 설명이 필요한 술에 거리감을 갖는 독자에게 지침서가 될 만하다. 책을 읽으며 어느새 ‘더 넓은 술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책은 560페이지에 달해 제목대로 버번 백과사전이라 할 만하다. 다만 이 사전은 어떤 계통이나 계열, 제조방법 등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위스키 증류소 단위로, 그러니까 ‘위스키 여행기’ 형태로 쓰였다. 첫 장 “버번 위스키란 무엇인가”를 제외하면 전체 중 500페이지 가량이 세계 유통 버번의 95%가 생산되는 미국 켄터키, 테네시 주변 위스키 증류소 17곳 탐방기다. 여정을 따라가는 구성은 ‘위알못’(위스키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술술’ 읽을 수 있다는 강점으로 이어진다. ‘메이커스 마크’ 증류소 주차장에서 마스코트 고양이 ‘위스키 진’을 만나고 축구장 570개 면적 전경을 바라본다. ‘잭 다니엘스’로 걸어 들어가며 마주친 건물·동상에서 창립자의 인생역정을 살핀다. ‘헤븐힐’ 존폐위기를 안겼던 화재사건, ‘짐 빔’ 시음 후 직원과 나눈 대화, ‘바즈타운 버번 컴퍼니’ 부회장 인터뷰처럼, 저자와 투어를 통해 술 자체는 물론 증류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게 되는 식이다.
참고로 ‘숙성’이 버번 제작공정에선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알코올 성분이 오크통 나무 세포벽을 뚫고 침투했다가 밖으로 나오며 색, 맛, 향이 좋아진다. 오크통 내 위스키는 증발하는데 ‘앤젤스 셰어’(Angel’s Share, 천사의 몫)라고 부른다. 연중 서늘한 스코틀랜드에서 천사는 연 1~2%를 먹는데, 더운 켄터키에선 평균 5% 수준이다. 4년 숙성 시 약 20%가 하늘로 날아가는 셈이다. 아울러 ‘잭 다니엘스’는 제작공정상 버번이지만 주법에 따라 ‘테네시 위스키’로 분류된다.
저자인 조승원 MBC 기자는 ‘술 덕후’다. 과거 팝과 록 뮤지션이 사랑하는 술을 다룬 <열정적 위로, 우아한 탐닉>, 하루키 문학에 등장한 술을 분석한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를 썼다. 2010년 국가공인 자격증인 조주기능사를 취득했고, 창사 50주년을 맞아 술 다큐를 연출하기도 했다. MBC 유튜브채널 ‘14F 일사에프’에서 술 콘텐츠 ‘주락이월드’도 진행한다. 이번 책 역시 ‘덕질’의 면모가 드러나는데 장기근속 시 보상휴가처럼 주어지는 20일, 미국에서 차를 몰고 모텔을 전전하며 취재를 했다. 여름휴가 중 하루 16시간씩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 과정답게 책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누군가에게 알려주려고 쓴 글을 볼 때 드는 즐거움을 함께 전한다.
◇일상의 벗 편의점 ‘맥주’가 달리 보인다
2018년 8월 나온 구간 <맥주, 나를 위한 지식플러스>(넥서스BOOKS)는 ‘맥덕기자의 맛있는 맥주이야기’, ‘심현희 기자의 술이야기’를 연재했고, 이메일 아이디조차 ‘맥덕’(macduck)을 쓰는 심현희 서울신문 기자의 ‘맥주 개론서’다. 실제 책은 ‘맥주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마시는 빵의 탄생’이란 목차로 맥주의 기본재료와 부재료, 제조과정, 맥주의 연원, 크래프트맥주의 선전까지 맥주의 역사를 훑은 후 ‘스타일별 맥주: 라거와 에일’, ‘세계 맥주 이야기’, ‘맥주 더 맛있게 즐기기’로 나아가며 ‘맥주의 과거와 현재, 지금 여기의 맥주’에 대해 개괄한다. 맥주 책은 정말 다양하지만 184페이지란 분량에 이만큼 ‘맥주의 모든 것’을 컴팩트하게 담은 경우는 드물다.
이 책의 매력은 편의점 맥주가 달리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례로 ‘필스너(Pilsner)’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스타일 ‘황금빛 라거’의 원형이다. 1830~1840년대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작은 도시 필젠(Pilsen)에서 만든 맥주는 맛없기로 악명 높았는데 양조사와 주민들이 의기투합해 독일 바이에른 출신 유능한 양조사를 데려왔고 이후 지역 경수와 맥아, 라거 효모, 사츠 홉을 결합해 새 맥주를 만든 게 시작이다. 그냥 먹던 맥주를 ‘라거’, ‘에일’로 구분하며 계보를 알게 되고 거기 깃든 사연까지 듣는 순간 맥주는 더욱 흥미진진한 액체로 거듭난다.
유명 맥주 브랜드 관련 여러 스토리도 담겼는데, ‘기네스는 아일랜드 맥주’란 통설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 대표적이다. 흑맥주 ‘기네스’의 창립자 아서 기네스는 북아일랜드 귀족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은 아일랜드가 영국에 흡수돼야 한다고 주장한 정당을 대대로 후원했다. 친일파 가문의 맥주회사가 한국 대표 맥주 브랜드가 된 셈이다. 오늘날 이미지는 기업 마케팅의 결과다. 무엇보다 ‘맥덕’으로서 저자의 본심이 잘 드러나고, 독자에 쓸모가 될 지점은 책에 수시로 등장하는 맥주 추천이다. 영국·미국·독일·벨기에 등 다양한 국가 맥주 수십여 종의 외관 일러스트와 알코올 도수, 맛, 특징이 함께 제공돼 ‘맥주 추천 가이드북’으로써도 손색이 없다.
◇쓰고도 단 서민의 술 ‘소주’로 바라본 한국인의 자취
책 <우리가 사랑하는 쓰고도 단 술, 소주>(서해문집)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자 UCI코리아 소장인 저자 남원상이 ‘소주’로 기록한 한국인의 사회문화 미시사다. “소주는 어쩌다 서민의 술, 인생의 쓴맛과 비통함과 애환이 담긴 술이 된 걸까”, “소주가 한국의 대표 술로 자리잡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에 대한 추적 리포트”란 저자의 설명이 책의 성격을 드러낸다.
2021년 출간된 책은 내용상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소주 산업이 겪은 변천사, 이와 맞물린 상품으로서 소주의 변화를 뼈대로 한다. ‘소주 도수의 변화’, ‘대표적인 소주병 색깔이 녹색인 이유’ 등 소주 자체와 얽힌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다만 저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참새구이와 포장마차의 유행’ ‘삼쏘(삼겹살과 소주)의 기원’, ‘화염병으로 재활용된 소주병’ 등을 다룬 장에서 드러나듯, 이 특수한 지위의 술과 공명하며 만들어진 우리들의 공통된 기억이자 자취다.
예컨대 책은 오늘날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폭탄주’란 용어가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로 1986년 ‘국방위 회식 사건’을 꼽는다. 당시 군 관계자와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여야 국회의원들이 서울 시내 요정에서 술자리 중 난투극을 벌였고,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이 국회 본회의 참석 거부를 하며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다. 대중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지만 이들이 마셨던 폭탄주는 유명세를 탔는데, 일반 대중의 술자리로 넘어오며 맥주에 양주가 아니라 값싼 소주를 더한 ‘소맥’으로 바뀌었다고 저자는 적는다.
수십년 전 신문기사는 물론 먼 과거 고려, 조선에서의 ‘소주’ 문헌까지 살핀 이 미시사를 보면 시공을 초월해 술 앞에 평등(?)한 사람의 모습을 새삼 실감한다. 책엔 1471년 세도가 홍윤성이 32살의 관찰사 이수남에게 소주를 억지로 먹여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설사약으로 상시 복용하던 소주를 몇 잔 권하다 그리 됐다’는 말에 성종이 문제될 게 없다며 편 든 기록이 나온다. ‘아버지의 첩과 아들이 불륜 끝에 독이 든 소주로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 ‘여진족과 왜인을 포섭하는 데 소주를 썼는데 하도 찾아오는 통에 조선 조정이 방문자제를 요청했다는 기록’도 있다. 책을 보고 나면 소주와 우리의 “쓰고도 독한” 인연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질기구나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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