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부고 단신' 아닌… 사연·업적 남긴 이들 발자취 조명

'유명인 중에 덜 유명한 인사' 오비추어리 쓰는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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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별세, ○씨 부친상=○일, ○장례식장, 발인 ○일 ○시. ☎○○-○○-○○”


언론사 기사 등을 통해 흔히 접하는 부고 알림이다. 전직 대통령, 정치인, 연예인 등 유명하고 잘 알려진 사람의 죽음은 긴 글이나 영상으로 남지만 필부필부는 이 한 줄로 남기도 어렵다. 언론으로선 의미 있는 자취를 남긴 이들을 조명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현재 기사로 다뤄지는 죽음의 대상이 너무 협소하고, 방식 역시 구태의연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남는다. 이 가운데 최근 몇몇 언론사 기자들을 중심으로 덜 조명된 죽음을 발굴하고 더 상세히 기록하려는 시도가 잇따라 나오며 주목된다.


김태훈 세계일보 오피니언담당부장은 지난 1월 발령 이후 18일 현재까지 총 60여명의 부고 기사를 온라인에 썼다. 참전용사, 예술가, 교수, 이사장, 관료, 정치인, 법조인 등 다양한 부문 인사를 다뤘고 ‘유명인 중 덜 유명한 인사’가 주 대상이다. ‘한 줄짜리 별세 소식’을 추가 검색과 취재, 나름의 평가를 담아 상당 분량 기사로 재탄생시킨다. 김 부장은 본보와 통화에서 “오피니언부장을 맡고 보니 이 부분이 좀 간과됐다고 생각됐다. 간단하게 처리된 분들 중에서도 중요한 사연이나 업적을 남긴 분이 있지 않을까 싶었고 다 건질 순 없겠지만 소개할 순 있는 선에선 찾아서 해보자는 취지”라며 “큰 일이 생긴 유족에 연락을 하기보단 검색을 하고 웬만해선 다 나온다”고 했다.

해외와 비교해 크게 활성화되지 못한 ‘부고기사’ 분야. 다만 국내 언론 전반에서도 부고기사를 둘러싼 시도는 다양해지는 추세다. (왼쪽부터) ‘비유명인 부고’의 새 지평을 연 연합뉴스 이충원 DB센터부장, 자사의 방대한 아카이브를 활용해 송해 선생의 별세를 다룬 KBS 이진성 기자, ‘한 줄짜리 별세소식’에 가려진 인물을 발굴해 보다 상세히 고인의 기록을 전하는 김태훈 세계일보 오피니언담당부장, 2014년부터 연재 중인 장문의 외국인 부음 시리즈 ‘가만한 당신’의 최윤필 한국일보 선임기자 등은 이 같은 시도의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 재벌의 인맥·혼맥 탐구한 언론인 박건승씨 별세>(5월27일) 기사가 대표적이다. 대다수 매체가 알림으로만 전한 부음 소식은 200자 원고지 5매 기사로 쓰였다. 고인의 고향과 졸업학교, 기자·경영인으로서 성과에 더해 “산업부에 근무하며 오랫동안 기업과 재계를 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국내 재벌의 인맥과 혼맥에 정통한 전문기자로 자리매김 했다”는 평을 남겼다. <토마스 하디 연구에 전념한 안진수 단국대 명예교수 별세>(6월24일) 역시 고인의 자취를 기록한 유일한 언론사 기사로서 ‘성실한 강의 준비와 자상한 학생 지도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는 지인의 목소리 등이 포함됐다. 김 부장은 “국제부 경험상 외국은 우리보다 부고를 중시하고 특히 지역언론이 활성화 돼 지역사회에 기여한 분들 부음도 많은데 기사가 안 나와 안타까울 때가 있다”고 했다.


이진성 KBS 기자도 지난해 4월 디지털뉴스부 발령 이후 꾸준히 부고 기사를 내왔다. 그간 무용가 이애주,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 사학자 강덕상, 국어학자 이수열, 산악인 김홍빈,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여사 등 20여명의 별세를 기사로 전했다. 인물 기사로 정평 난 그는 과거 타 부서에서도 여건이 되면 부음기사를 써왔고, 옛 문예지를 참고해 리스트 작성·정리를 해두기도 한다. ‘팩트체크K’ 코너를 전담하지만 “소재나 접근이 자유로운 디지털뉴스부”의 이점을 살려 “짬나는 대로 준비를 하고 출고를 하는” 식이다. 현장 취재도 불사하면서 송해 선생의 별세 전 사무실을 방문하기도 했고, ‘한옥 지킴이’ 피터 바돌로뮤씨가 세상을 떠났을 땐 장례식장 취재를 하기도 했다.


특히 KBS의 방대한 아카이브를 활용해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고인의 생전 모습을 전한다는 차별점이 있다. 예컨대 지난 2월과 6월 화제가 됐던 <故이어령이 말하는 이어령, “나는 우물 파는 사람, 내가 마시려는 게 아니다”>, <전국노래자랑 34년…‘영원한 현역’ 송해 별세> 등엔 과거 인터뷰 영상과 사진 등 기록이 담겼다. 이 기자는 “외국처럼 세상을 뜬 다음 기사가 출고될 거라 엠바고를 걸고 인터뷰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당사자가 꺼려할 수 있고, 절충점으로 방대한 아카이브를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특히 이어령·송해 선생의 경우 생전 활동이나 영상, 육성 기록을 보유한 만큼 타사와 차별적인 포인트도 만들 수 있다고 봤다”면서 “2016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별세 기사가 당시 네이버에서 30만 뷰를 기록하며 의미에 더해 기사 자체도 팔리는 경험을 했다. 이 영역은 아직 블루오션이라 본다”고 했다.


국내 언론 전반에서 부고 기사를 둘러싼 시도는 다양해지는 추세다. 2014년부터 한국일보 최윤필 선임기자가 연재 중인 장문의 외국인 부음 시리즈 ‘가만한 당신’은 책, 신문기사, 방송클립, 판결문, 회의록, 이메일, 대중의 평 등 꼼꼼한 취재에 더해 문학적 성취에 가닿는 글로 상당 팬을 보유, 언론사 콘텐츠로서 부음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유명인 부고 기사’의 새 지평을 연 이충원 연합뉴스 DB센터부장의 시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기사화되는 인물의 문턱을 낮추고 대상을 넓힌 경우다. ‘아이스크림 메로나 개발자’, ‘장충동 족발골목 1세대 뚱뚱이 할머니’의 별세 소식 등이 연합뉴스 기사로 나가 여러 매체가 받아쓰기도 했다. 근대사에 족적을 남겼지만 덜 알려진 1930~1940년대생 인물 280여명 부고기사를 미리 써놓기도 했다. 장애인언론 비마이너는 2019년부터 ‘무연고 사망자’의 부고를 알리는 중이다.


언론이 ‘누구’의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언론의 지향을 드러내는 단초다. 다만 콘텐츠로서 가능성이 고민돼 본 적이 없고, 앞선 시도들도 기자 개인 차원의 노력을 넘어섰다고 보긴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진성 KBS 기자는 “유명인이 세상을 떠나면 연합뉴스가 쓰고 타 매체는 조금 더 취재해 지면을 터는 식이지 않았나. 저희도, 타 매체 대부분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대응하는 여건은 못 됐다”면서 “회사 여력을 고려해야겠지만 전담 부서는 아니더라도 ‘이 인물 부고는 전문성 있는 누가 쓴다’ 정도는 준비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어 “저는 누군가의 생을 정밀히 아는데 재미를 느껴 ‘덕질’을 하는 건데 사회 초년생들은 누군지도 모를 수 있다. 취재경험이 있는 분들이 관심을 갖고 활동해주면 좋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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