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 센 천하장사~’ 한때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만화 ‘마징가Z’ 주제곡을 만든 와타나베 주메이씨가 지난달 별세했다. 향년 96세. 뛰어난 업적을 이룬 90대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요즘 일본에서 부쩍 자주 접하게 된다.
탄생 100년 전후의 것들이 수명을 다하는 건 인간뿐만이 아니다. 일본에서 가장 길게 사용한 연호인 ‘쇼와’의 시작이 1926년. 패전과 일왕의 인간선언,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의 구분, 첫 도쿄올림픽, 고도경제성장기와 거품 붕괴 등 현대 일본의 견고한 틀을 짜놓은 쇼와 시대와 함께 일본의 전성기를 지나 이젠 저물어 가는 것들이다.
일본 구석구석 깔린 재래선 철도도 그 중 하나이다. 각지의 철도회사들은 최근 적자 노선을 공표하기 바쁘다. ‘노선 폐지’에 대한 예고나 다름없다. 홋카이도 동단의 지역 열차 하나사키선도 마찬가지다. 구시로시에서 네무로시까지 135km, 두 시간 반 여정을 달리는 하나사키선은 1921년 개통해 101년째 같은 길을 달려왔다. 그럼에도 폐선 위기는 피해갈 수 없었다. 홋카이도의 대자연과 람사르 습지, 해안 절벽을 차창에 품고 달려온 백 년의 시간이 무색했다.
쇼와 50년(1975)에 하나사키선의 일일 운송밀도는 1879명이었다. 지금은 200명 정도에 불과하다. 종착역 네무로시의 인구는 4만명대에서 2만명대로 절반이 증발했다. 역 스무 곳 중 평균 승차 인원이 한 자릿수가 8곳이고, 가장 적은 곳은 0.2명이다. 이 상태로 노선을 유지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2016년 ‘더 이상 단독 경영이 어렵다’는 철도 회사의 발표에 비상이 걸린 건 일본의 최동단 끝자락에 있는 네무로시였다. 러시아와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 인접 지역’, 그리고 ‘최동단 철도 노선 보유 지역’ 정도가 네무로시를 내세우는 표현인데, 노선 폐지와 함께 열차가 달리는 절경도, 최동단 유인역과 무인역도 모두 없어지는 것이었다.
이 소도시 자치단체에 철도를 살리기 위한 여윳돈이 있을 리 없었다. 네무로시는 하나사키선 승객을 늘리기 위해 브랜딩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구탐색철도’라는 이름을 만들고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첫해인 2018년에만 3억엔이 모였고, 이후에도 매년 ‘억’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계절별로 절경을 달리는 열차의 모습을 담은 고품질의 영상을 제작하고, 기금을 만들어 열차를 홍보하고 있다. 철도회사는 하나사키선의 무인역을 하나둘 없애며 집중개혁에 돌입했지만 열차는 오히려 이름을 알리고 있다. 하나사키(花咲), 즉 ‘꽃이 핀다’는 노선의 이름처럼 희망이 싹트는 듯했다.
하나사키선을 살리기 위해 기부금을 보낸 2만여명의 면면은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일본의 ‘철도 오타쿠’들이 힘을 보탰을 것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취재차 들른 몇 곳의 무인역. 승객은 없어도 사라진 역을 보고자 달려온 오타쿠들은 반드시 있었다. 홋카이도의 모든 역마다 내려보는 여행을 즐기거나, 일본의 동서남북을 돌며 액자에 넣어 장식할 인증서를 모으고 있었다. ‘꿈의 공간 하나사키선 모임’을 만든 스즈키 가즈오씨도 그 중 하나다. 스즈키씨는 매일 오전 5시와 저녁 7시쯤 출퇴근을 전후해 네무로역에 들러 열차의 운행 상황을 확인한다. 승객 수는 몇인지, 연착되지는 않았는지, 열차의 종류는 어떤 것인지 등을 SNS에 기록한다. 이 작업을 10년 가까이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가 입고 다니는 점퍼와 명함 디자인, 이메일 주소도 모두 하나사키선과 같은 디자인이다. 지금까지 모아 온 역의 입장권에 찍힌 발급 시각은 모두 오전 5시 정각이다. 반면 라벤더밭으로 이름을 날린 홋카이도 후라노를 지나는 철도 노선은 올해 초 폐지가 결정됐다. 자치단체들은 노선 유지 조건인 분담금 11억엔 납부를 거부했다. 모든 여건이 철도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사회의 크고 작은 변화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고령화와 인구감소 문제로 수렴된다. 쇼와의 시작과 지나온 100년. 축적된 기억을 지키려는 오타쿠들의 열정이야 식지 않겠지만 일본이 맞닥뜨린 시대의 흐름은 냉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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