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원 연합뉴스 DB센터부장 집엔 6년째 아기가 있다. 흔히 우리가 아는 ‘위탁모’, 즉 입양 전 위탁가정 활동을 해서다. 보통 생후 1~2개월의 아기들이 온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2년을 돌보다 보낸다. 그렇게 ‘토실이(호칭)’와 ‘힝순이’가 각각 20개월씩 머물다 노르웨이 가정에 입양됐다. 현재 맡은 ‘깔끔이’는 19개월을 보살폈고 연말까지 2년을 함께할 예정이다. 그는 “아이가 떠나면 집이 동굴 같아지는데 첫 아기가 가고 그랬다. 둘째가 올 때까지 한두달이 걸렸는데 나중엔 홀트아동복지회에 ‘아기를 좀 빨리 달라’고 애원할 정도가 되더라. 보통 위탁모들이 그런다는데 우리도 그랬다”고 했다.
시작은 아내 김명희씨의 뜻이었다. 2017년 고등학생이던 아들이 캐나다로 유학을 갔고, 그쯤 아내가 ‘위탁모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고3이 된 딸이 신경 쓰였지만 40대 후반 기자 남편은 아내에게 “싫다는 말을 하기가 그래서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간 장만한 유모차만 세 대, “아기들은 사람 홀리는 재주를 갖고 태어나는구나” 싶지만 육아가 쉬울 리는 없다. 퇴근 후나 주말 “어야 갈까?(놀러 나갈까)”하면 아기가 옷과 양말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온다. 잠시나마 아내와 아기를 떼놓고, 분리수거 등 집안일을 거드는, 보조 역할이 그의 일이다. “와이프 지분이 99%다. 제가 하는 큰 일은 페이스북에 ‘위탁모 일기’를 쓰는 거다. 와이프가 엄청 좋아해서 누가 ‘좋아요’를 눌렀고, 어떤 댓글이 달렸는지 꼼꼼히 본다. 사람들 반응이 과장됐다고 느껴질 정도로 커서 함께 놀란다. 엄마들한테 물어보니 육아할 때 호응 없는 게 제일 답답하대서 자신을 돌아볼 때도 있다.”
아기가 오고 그는 많이 달라졌다. 일본 특파원을 지냈고 북한·일본 등 동북아 문제 전문가인 26년차 기자는 젊은 시절 “집에 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과음 후 집에 와 토하고 차려놓은 아침도 못 먹고 출근하기 일쑤였던 “너무 힘든 때”였다. 한번은 탈북자 인권을 취재하며 울다가 “세상에 이런 인권 투사가 없는데 집에선 가부장제의 화신”이란 핀잔도 들었다. “솔직히 아들, 딸이 어떻게 컸는지 잘 몰랐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육아를 옆에서 보니 수유 텀이 형성되는 100일까진 거의 잠을 못 자더라. 새삼 ‘아이는 저절로 크지 않는다’ 싶었다. 제가 아침에 약을 먹으려면 뭘 좀 먹어야 하는데 예전처럼 밥 차려달라고 하기 미안해 배달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고 나온다. 부부 사이도 나도 많이 달라졌다.”
세상에 대한 관심 폭도 더 넓어졌다. ‘미혼모 무궁화호 아기 유기’, ‘정인이 사건’, ‘조유나 양 일가족’을 보며 예전과 다른 충격을 받았다. 근원적인 문제는 ‘가부장제’라 생각했다. “낳았으니 책임을 져야한다고만 생각했었다. 위탁가정 일을 해보니 육아의 모든 책임을 엄마에게만 묻는 사회에서 그런 요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정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미국처럼 위탁가정에 맡겨 키우면 ‘육아 포기’가 ‘아이 살해’가 되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사건을 보며 ‘정 힘들면 아이를 죽이지 말고 저희에게라도 맡겨 달라. 친부모만큼은 못해도 최선을 다 하겠다’는 얘길 우리 부부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회도 대안을 모색할 때라 본다.”
쉰을 넘은 1969·1970년생 부부는 이제 봉사 이상 차원으로 이 일을 받아들인다. 아내는 친권이 포기된 ‘입양 전 위탁모’ 활동에서 나아가 ‘학대아동 위탁모’를 하기 위해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 차후 친권 있는 아동 위탁도 맡아보려 한다. 남편은 ‘위탁모 일기’를 책으로 쓸 예정이다. 퇴직 후 부부는 몇몇 가족, 친지와 함께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단체를 만들어 ‘사회적 엄마·아빠’가 되는 꿈을 요즘 꿔본다. ‘가부장제의 화신’이 “어야 갈까”를 하다 많이도 변했다. 그의 말대로 “아기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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