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24주 이내 여성의 임신중단권리(낙태권)를 기본권으로 인정한 ‘로 대(對)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49년 만에 뒤집었다. “임신중단권리는 헌법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았다”는 게 판단의 주요 논거였다.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에 헌법적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50년 가까이 여성의 낙태권을 형식적이나마 인정해온 판례가 일거에 무효화 되자 미국은 물론 국제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 현지시각으로 지난 24일, 한국 시각으론 금요일 밤늦게 전해진 소식을 KBS는 다음날 ‘뉴스9’에서 톱뉴스로 다뤘고, 전국 단위 종합일간지들은 월요일인 27일자 신문에서 상세히 보도했다. 27일 조간신문(종합일간지)들은 대부분 1면에 주요 기사로 싣거나 한 면을 털어서 이번 판결의 의미를 분석하고 어떤 후폭풍이 예상되는지 등을 다뤘다.
특히 평소 젠더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던 신문사들은 이번 사건을 더 비중 있게 보도했다. 한겨레신문은 ‘여성의 기본권이 부정당했다’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 외에 2면 전면을 할애해 “보수의 선봉”이 된 미 대법원을 비판적으로 보도했고, 경향신문도 1면 기사와 사진, 4면 특집면 등에서 미국 여성의 삶이 후퇴했다고 진단했다. 이들 신문은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보수 우위가 된 미 대법관들이 피임과 동성혼 등을 인정한 판례도 뒤집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사설을 쓴 신문사도 경향신문과 한겨레, 그리고 한국일보뿐이었다. 모두 젠더데스크 혹은 젠더 담당 기자가 있는 곳들이다. 이들 신문사가 바다 건너 나라의 판결을 두고 사설까지 쓴 까닭은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3년째 입법 공백 상태인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릴 때 주요 참고 자료로 쓰인 게 ‘로 대 웨이드’ 판결이었다. 경향신문은 “그런 판례가 폐기된 점, 임신중단권에 부정적인 국민의힘이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관련 논의를 활발히 주도하는 점 때문에 국내에서도 임신중단권 관련 논의가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고 전했다.
경향은 이어 사설에서 “이번 판결이 뒤집힌 이유 중 하나로 미국 정치권의 직무태만이 지적된다.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50년이 흐르는 동안 정치권이 낙태권을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헌재는 낙태죄 폐지를 보완할 입법을 2020년 12월31일까지 마무리할 것을 국회에 주문했으나, 정부가 최장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뒤에도 후속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한국일보는 ‘퇴행적 美 낙태 판결... 한국 입법 공백 해소를’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국회가 발의된 개정 법을 심사하지 않고 있고, 입법 공백 상태에서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약들이 불법 거래되는 등 안전한 임신중단 환경은 아직 요원하다. 여성가족부 폐지 등 노골적으로 성평등에서 퇴행하는 정부와 여당의 입장이 입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약자의 인권 보장이라는 사법부와 입법부의 역할을 다시 확인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한겨레도 ‘미국 ‘임신중지권’ 판례 폐기, 우리는 3년째 입법 공백’이란 사설을 통해 “미국 연방대법원의 이번 결정은 수백만의 미국 여성을 헌법의 보호 밖으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인류가 성취해온 보편적 인권의 가치마저 부정한다는 점에서 미국만의 문제를 넘어선다”고 지적하며 “어렵사리 임신중지권을 확대해온 우리 사회도 관련 입법의 공백을 해소해야 할 시급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국회의 ‘직무유기’로 인해 “임신중지 관련 의료행위가 대부분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등 당사자들의 피해가 계속되고 있다”면서 “국회는 당장 여성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반영한 입법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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