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퇴임 이틀 전에 받은 책은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33년의 기자 생활을 정리하며 나온 책이라 더 애틋했는지 모른다. 띠지에 얼굴을 넣어 조금 민망했지만 하하…. ‘오랫동안 자기답게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붙인 책 제목은 ‘각별한 당신’. 한참 동안 책장들을 넘겨 보았다. 그동안 만나 인터뷰한 사람들 얼굴이 하나둘 달덩이처럼 떠올랐다.
김종철 한겨레 전 선임기자가 펴낸 ‘각별한 당신’(사이드웨이)은 사람 이야기로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책에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각별한 마음이 웅숭깊다. 기자 말년인 2017년 12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한겨레 토요판팀 기자로 있으면서 인터뷰했던 100여명 중 스무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서문에서 “한 인물을 만나서 오래 대화하고 기사를 준비하다 보면 그분들은 저절로 저의 거울이 됐다”고 썼다. 각 장에 실린 후기만 봐도 그렇다. 인터뷰 뒷이야기를 알알이 담았고, 인터뷰이와 교류하며 느꼈던 저자의 감정을 진솔하게 풀어냈다.
“기갑의 돌파력으로 차별을 없애버리고 살 수 있다”며 환하게 웃던 고 변희수 하사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를 비롯해 시간이 오래전에 정지돼 있는 듯했던 평화시장 2층의 한 다방에서 만난 ‘전태일 평전’의 시다 실제 모델 신순애씨, 56년 만의 미투를 한 최말자씨, 농부 과학자 이동현씨 등 이 책에 등장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울림을 준다.
애초에 그들 삶 자체가 향기롭기도 했거니와 그런 각별한 사람들을 찾아 깊게 읽고, 스토리를 풀어내는 저자의 글도 한몫했다.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의 추천사 한 대목처럼 “낮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화법”으로 인터뷰이의 얘기를 담담하게 끄집어낸다. 그가 묻는 질문은 인터뷰이의 살아온 세월을 어루만지는 공감의 언어들로 가득하다. 인터뷰이에 대한 연구가 충분치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질문은 말할 것도 없고, 인터뷰이가 꼭꼭 숨겨두었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도록 편안하게 대화를 끌어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그와 초면이거나 얼굴만 아는 관계이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 깊숙한 데 넣어놨던 내면의 이야기를 들려줬을까. “준비를 꼼꼼히 하면 이야기가 깊어지고 ‘나에 대해 이렇게 많이 연구를 해왔나’ 싶어서 마음을 빨리 여는 것 같아요. 포장하지 않고 정직하고 소탈하게 쓴다고 할까요. 인물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고, 이런 일을 하는지 맥락이 전해지게 쓰려고 하죠.” 그는 인터뷰 준비를 위해 책, 논문, 언론 기사를 꼼꼼히 읽고 몇 년 치 SNS를 뒤져 인터뷰이의 삶 자체를 들여다본다. 판사를 하다가 행정부 공무원으로 전업하고 4권의 소설을 낸 정재민씨는 인터뷰가 끝나자 이렇게 말했다. “되게 깊이 묻네요. 이렇게까지 심층적인 인터뷰는 처음 해봤어요.”
그는 지난 5월31일 한겨레에서 정년 퇴임했다. 1989년 CBS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왔고 1995년 한겨레로 옮겨 정치부 기자, 편집부 기자, 논설위원, 정치부장, 정치부 선임기자, 신문부문장, 토요판 기자로 일하다 33년의 기자 생활을 마감했다. 2007년 췌장의 절반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는 등 고비도 있었던 터라 “잘 끝내서 대견하다”며 자신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며 선후배들에게 고마워했다.
33년, 강산이 3번 바뀌는 세월을 기자로 살면서 때론 부끄럽고 때론 뿌듯했던 일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2019년 6월27일 저녁을 남다르게 기억한다. 그날 문재인 대통령이 오사카 동포 간담회에서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및 가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몇 달 전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이철 대표 등 재심에서 간첩혐의 무죄 판결을 받은 재일동포 양심수들이 자신들에 관한 책인 ‘조국이 버린 사람들’(저자 김효순) 일본어판 출판기념회를 마련했는데, 이를 동행 취재했다. 조국에 의해 버려졌던 재일동포 양심수들의 아픔과 고통을 듣고, 국가의 사과를 학수고대한다는 그들에게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나온 기사가 2018년 12월에 쓴 <무죄로 떳떳이 살게 됐으나 대한민국의 사과 받고 싶어-재일동포 양심수들의 사은행사>였다. “또 다른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 피해자가 1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날이었어요. 그분을 도왔던 몇 분들과 저녁을 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의 공식 사과 소식이 전해졌죠. 감격스러워하는 그분들을 보며 ‘내가 조그마한 힘이 됐구나’하는 생각에 벅차오르더라고요. 기자로서 가장 보람 있고, 뿌듯했던 경험이었죠.”
인생 2막에 대해 묻자 “동네에서 일손이 필요하면 기꺼이 빌려주고,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지 특별한 계획은 없다”고 했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의 말씀 중에 ‘만절(晩節)’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있어요. 나이가 들면 자기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뜻인데, 노추라는 말도 있잖아요. 언론인으로서 33년을 살았기 때문에 언론계나 후배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피해를 입은 동포들 모임인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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