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또 저 얼굴이다. 취재원과 밥을 먹을 때나 회의 시간에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얘기가 나오면 주로 나오는 얼굴 표정이 있다.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난다는 얼굴인데, 한때 유행했던 ‘얼굴 분석’ 어플리케이션에 저 얼굴을 넣고 돌리면 아마 무표정과 슬픔, 화남, 경멸이 적절히 배합된 분석 결과가 나올 것이다. 사실 멀리 갈 것 없이 나 또한 그런 얼굴로 이 칼럼을 쓰고 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은 너무나 해묵은 과제다.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8년, 여당과 야당이 일정 비율로 이사를 추천하는 ‘관행’이 굳어진 이후 그동안 큰 틀의 변화가 없었다. 시대가 변화하며 지배구조 차원에서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별다른 제도적 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약속하며 출범한 문재인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차례 관련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적극적 논의는 없었다.
지난 4월 말,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 171명 전원이 이름을 올린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이 나왔을 땐 심드렁한 얼굴이 ‘설마’하는 기대감 섞인 표정으로 바뀌긴 했다. 25명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 구조가 생소하긴 해도, 지금보다는 정치적 독립을 보장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다만 법안 발의에서 끝나버리진 않을지 언론계 우려가 컸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려는 현실이 된 듯하다. 검찰 수사권 분리 법안으로 커진 여야 대립에 장관 인사청문회와 지방선거 일정으로 역시나 법안 논의는 후순위로 밀렸다. 보다 못한 전국언론노조가 지난달 24일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 사무실에서 농성을 했는데, 마지못해 하반기 국회에서 최우선 법안으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올해 하반기도 아닌, 하반기 국회라니. 처리 기한은 또 그렇게 2년으로 훌쩍 늘었다.
그렇다면 정말 하반기 국회에선 이 법안이 처리될 수 있을까? 몇몇 언론계 관계자들에 물었더니 대부분 고개를 젓는다.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내홍을 치를 수도 있는 민주당이 법안에 관심을 가지긴 힘들 거라는 얘기다. 내년 2월로 예정된 MBC 사장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신속하게 논의를 진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국민의힘이 협조할지 장담할 수 없다.
이럴 바엔 공영방송과 관련한 법률을 확장하자는 제언도 나온다. 사장과 이사 선임에만 한정된 개정안을 더 넓혀 방송환경 변화에 따른 공영방송의 개념과 역할, 책무 등을 재정비하자는 것이다. 마침 지난달 20일 한국언론학회 주최로 열린 방송사 사장단 라운드테이블에서 김의철 KBS 사장도 비슷한 말을 했다.
김 사장은 “수십 년 동안 공영방송 관련한 논의는 KBS 사장과 이사를 어떻게 뽑는지에만 머물러 있다”면서 “거버넌스도 중요하지만 공영방송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명확히 규정하고, 그 역할과 책임에 충실하려면 어디까지 서비스를 해야 하는지, 그 서비스에 소요되는 재원은 어떻게 할 것인지 명확히 법률로 구현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마 관련 논의가 시작된다면 꽤 지루할 것이다. ‘사이다’같은 과정과 결말도 없을 테다. 다만 무표정과 슬픔, 화남, 경멸이 배합된 얼굴에 조금쯤 긍정적 감정이 나타날지 모른다. 어차피 사장과 이사 선임 구조 변화는 공영방송 논의의 시작일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지배구조 개선 법안의 통과가 어렵다면, 적어도 시일이 걸린다면. 미리 공영방송의 근본적 역할과 책임이라도 논의하고 있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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