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서 김 서방 찾기'만큼 난감했던 '싱가포르서 권 대표 찾기'

현지 취재 나선 기자들 '싱가포르 뻗치기'
루나 개발자 권도형의 "회사 정상운영" 거짓말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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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범 SBS 기자는 지난달 22일 일요일 오후 동남아 음식점에서 회사 전화를 받았다. “싱가포르에 가서 테라폼랩스 권도형 대표를 취재해야겠는데….” 비행기 시간은 오후 6시30분, 5시간 뒤였다. 테라폼랩스가 발행한 코인 테라와 루나가 최근 폭락했다. 손실을 본 투자자가 속출했고 권 대표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던 차 지난달 21일 권 대표 SNS에 ‘지난해 12월부터 싱가포르에 체류했고 회사가 그곳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란 글이 올라왔다.
박 기자는 지난달 27일 통화에서 “두 가지 미션이 있었다. 본인이 공식입장을 냈으니 만날 수 있으면 만나보자, 테라폼랩스가 정상 운영되는지 확인하자였다”고 했다. 쌀국수를 먹다가 싱가포르에서 36시간을 취재한 여정의 시작은 그랬다.

테라폼랩스 홈페이지에 적힌 싱가포르 사무실 주소를 찾아간 박찬범 SBS 기자가 SBS ‘8뉴스’에 등장한 모습.(위부터 반시계 방향) 지난달 19일부터 싱가포르에서 취재를 하고 있는 조은지 코인데스크코리아 기자의 기사, 지난달 21일부터 28일까지 현지에 머물렀던 곽진산 한겨레 기자의 보도 각각 캡처.


23일 오전 9시(현지시간) 테라폼랩스 홈페이지에 나온 사무실 주소, 건물 32층을 방문했다. 양현철 영상기자, 유진영 촬영보조, 현지 코디 등 4인은 홈페이지와 법인등기부에 나온 사무실 주소, 권 대표 주거지 정도를 알고 취재에 나섰다. 해당 층은 로펌이 쓰고 있었다. 로펌 직원은 이곳은 우편물·공문을 받는 ‘Registered Office’이며, 최근 관계가 해지(terminated)됐다고 답했다. 오후 2시, 법인등기부에 적힌 고층 복합건물 37층을 찾았다. 공사 자재가 널려 있었다. 문틈으로 ‘테라’ 글씨가 보였다. 입주 업체에선 리노베이션을 하다 4월에 공사가 중단된(not completed) 이후 관계자를 볼 수 없다고 했다. 입주한 건 사실이지만 정상 운영 중인 사무실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앞서 한인식당 등을 돌며 추정 인물을 본 적 있다는 얘길 들었다. 그렇게 <[단독] ‘루나’ 권도형 싱가포르 본사 주소 2곳 찾아갔더니> 등을 쓰고, 저녁뉴스에 라이브로 출연했다.


24일 오후엔 권 대표 주거지를 찾았다. 25일 오전 1시10분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가는 일정, 입국에 필요한 코로나19 신속항원 검사결과 때문에 오전엔 병원에 가야했다. 경비원에게 신고하고 도착한 집 앞에서 아기 울음소리와 한국 동요가 들렸다. 국내에선 입주민을 따라 공용현관에 들어가 권 대표 자택 초인종을 누른 BJ에 ‘주거침입’ 혐의 적용이 거론되던 터, 그냥 기다렸다. 잠시 후 30대 백인 남성이 현관문을 열고 나와 ‘(권 대표를) 모른다, 주소를 잘못 찾아왔다, 나가달라’고 하면서 권 대표를 만날 순 없었다.


박 기자는 “눈으로 직접 ‘정상 운영 중’이란 입장을 반박하는 팩트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성과라 생각한다. 다만 인터뷰를 못했으니 절반의 소득”이라며 “만나게 되면 떳떳한데 왜 언론 접촉을 피해왔는지, 국내 투자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묻고 싶었다. 또 코인 알고리즘 설계와 앵커 프로토콜 판매 과정 같은, 사기혐의를 가릴 부분을 질문하려 했다”고 말했다.


테라와 루나 폭락 후 일부 언론에선 이 같이 싱가포르에 기자를 보내 권 대표의 행방을 쫓아왔다. 말이 쉽지 ‘볏짚에서 바늘찾기’이자 ‘맨땅에 헤딩’이 될 수밖에 없는 취재환경이다. 지난달 21일부터 28일까지 싱가포르에 머문 곽진산 한겨레 기자는 지난달 26일 통화에서 “처음 도착해서 돌아다녀 보는데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나라 자체가 크진 않지만 사람과 차가 너무 많았고, 익숙지 않은 동네인데다 말도 안 통하고 마스크를 다 쓰고 다니다보니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고 했다.


23일 오전 법인등기 주소지인 사무실, 37층을 찾았고 운영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곽 기자는 “애초 목표가 권 대표를 만나자, 못 찾더라도 최대한 흔적은 찾아보자였다. 솔직히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없다는 기사를 쓰는 거보다 누군가 있는 게 찾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며 “아무 것도 없다보니 ‘맨땅에 헤딩’이었다. 현지에서 도와주는 분들이 권 대표가 갈만한 지역을 추천해주면 해당 지역에 사진을 들고 다니며 ‘본 적 있나’ 묻고 다녔다. 알만하다 싶은 사람에게 트위터나 텔레그램, 문자, 이메일로 계속 ‘컨택’을 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에 머물며 <[단독] ‘테라’ 권도형 “싱가포르 있다”더니…현지 사무실 폐쇄>를 썼다. 권 대표가 등기이사로 등록됐고 테라폼랩스에 자금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하는 재단 ‘루나 파운데이션 가드(LFG)’가 싱가포르 내에서 허위 주소를 등록해 운영 중이란 <[단독] ‘테라’ 자금 창구 ‘루나파운데이션’도 싱가포르 사무실 없었다> 보도도 내놨다. 곽 기자는 “‘싱가포르 뻗치기’를 했는데 권 대표 뒤꽁무니조차 못 본 실패한 취재라 사실 할 말이 많진 않다”면서 “만나게 되면 공식적으론 ‘테라 붕괴 전 대표님은 알고 계셨나’ 같은 질문을 하려했지만 개인적으론 ‘싱가포르에 진짜 있었네요’ 이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현재도 일부 매체는 싱가포르에서 계속 취재를 진행 중이다. 아직 권 대표를 만났거나 확실한 행방을 파악했다고 전한 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가상자산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가운데 불거진 이번 사태를 두고 실패한 혁신인지, 사기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확신 없는 취재에 상당 비용을 들이고 어려운 여건 속 ‘맨땅에 헤딩’ 중인 몇몇 기자의 고생에 가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사실의 조각이 늘고 있다.


한겨레 자회사이자 블록체인 전문매체 코인데스크코리아(코데코) 조은지 기자는 지난달 19일 출국해 가장 이른 시점에 현지취재를 시작한 쪽이다. 박근모 코데코 편집장 대리는 지난달 26일 통화에서 “국내에서 다룰 수 있는 건 타 매체도 다룰 수가 있고 전문지로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걸 고민하다 현장에 가서 상황을 파악해보자 했다. 보유 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가장 먼저 확인하려 했고 상황이 급하다보니 결정 후 다음날 곧장 조 기자가 가게 됐다”면서 “돌아오는 날짜는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연합뉴스 김남권 특파원도 지난달 26일 이후 권 대표 거주지, 한인 사회 등을 취재한 르포 기사를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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