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알게 된 ‘고수’가 있다. 요즘 국내 여러 방송에 두루 출연해 중국 전문가로 주가를 높이는 이철 컨설턴트다. 1997년에 중국 주재원으로 처음 이곳에 와서 30년 가까이 살아온 터줏대감이다. 중국 관련 조언을 듣고자 종종 만남을 청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이제라도 우리가 대만의 재도약에 주목하고 바짝 긴장해야 한다”고. 글로벌 기관들의 리포트를 살펴보면 한국보다 대만 경제의 미래를 낙관하는 의견이 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대만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6051달러로 한국(3만4994달러)을 19년 만에 추월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미 대만 증시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11월부터 우리 증시를 넘어섰다. 대만이 인구 및 GDP 규모에서 한국의 절반 수준이고 수교한 나라도 14개국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 때 몇몇 오피니언 리더들이 언론매체를 통해 “머지않아 한국이 1인당 GDP에서 일본을 따라잡는다”고 기뻐하던 모습을 종종 지켜봤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실업자로 전락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채 정부와 코드를 맞춰 ‘국뽕’을 자극하려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 어쨌든 우리가 ‘잃어버린 30년’의 늪에 빠진 일본을 곧 이긴다고 기뻐하는 사이 대만은 조용히 여러 분야에서 우리를 뛰어넘기 시작했다.
기자가 대학에 입학한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일본은 한국보다 20년, 대만은 5년 앞섰다’는 말이 회자됐다. 국내 주요 기업 회장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대만의 선진 사례를 배워 큰 성과를 냈다”고 자랑하곤 했다. 1997년 우리나라가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면서 재벌들이 한꺼번에 무너졌고 한국 경제도 주저 앉았다. 대만 추격도 이렇게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런데 2000년대 접어들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대만 경제의 버팀목인 중소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중국 본토로 떠나면서 산업 공동화가 생겨난 것이다. 반면 한국에선 ‘IMF 회초리’ 덕분에 체질이 개선된 삼성·SK·현대차·LG 등 수출 대기업들이 ‘규모의 경제’로 성공을 거뒀다. 결국 대만은 2003년 1인당 GDP에서 한국에 역전을 허용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제조업 경쟁력까지 상실해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가운데 최약체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질 좋은 일자리가 사라지자 대만인들은 자신의 땅을 ‘구이다오’(鬼島·귀신이나 사는 섬)로 부르며 자조했다. 지금도 유튜브를 검색하면 “한국 기업들의 급여 수준에 놀랐다”며 이런 데서 일하고 싶다는 대만 젊은이들의 바람이 담긴 콘텐츠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야구선수 요기 베라(1925~2015)의 말대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2016년 집권한 차이잉원 총통(대통령)이 반도체 산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시작한 것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대만 업체들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세계적 흐름에 빠르게 안착하면서 2019년 11월 대만 대표 IT 기업인 TSMC의 기업 가치가 삼성전자를 앞지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시장에서 ‘3류’로 취급받던 미디어텍의 제품이 삼성전자 ‘엑시노스’의 성능을 뛰어넘는 등 곳곳에서 ‘한국 추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안타깝게도 같은 시기 한국은 최대 강점인 대량생산 노하우가 중국 기업들에 간파돼 추격을 허용하고 있다. 핵심 산업인 자동차와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에서 중국 기업에 시장을 잠식당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경제에 새로운 처방전이 필요해 보인다.
한국과 대만은 수출 의존도가 높고 제조업 중심 산업 구조라는 점이 비슷하다. 대만 경제가 반도체 등 특정 산업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아 한국보다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지만, 그럼에도 대만의 괄목성장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아직 배울 점이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통받는 우리 젊은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대만의 사례를 두루 살펴 해법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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