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우토로의 역사를 통해 인권에 대해서 생각하고, 평화를 바라는 곳으로. 일·한시민의 교류 거점이 되길 기대한다.”
마츠무라 아츠코 교토부 우지시장의 말이다. 아츠코 시장은 지난달 30일 우지시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해 이렇게 기대를 전했다. 일본의 자치단체장이 지역 행사에 참석해 축사하는 일이야 일상이겠지만 지금까지 우토로 지구가 거쳐왔던 지난한 역사를 곱씹어보면 뜻깊은 장면이었던 건 틀림없다.
교토부 우지시 이세다초 우토로 51번지. 2차대전 때 교토비행장 건설에 투입됐던 조선인들이 일본의 패전 후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살아왔던 곳, 그때 모여 살았던 ‘함바’가 우토로 마을의 시작이다. 우토로의 원래 지명은 우지시(宇治市)의 ‘입구’라는 의미가 담긴 ‘우토구치(宇土口 / うとぐち)’이다. 그런데 일본어로 ‘구치’라고 발음하는 한자 ‘구(口)’가 가타카나의 ‘ロ(로)’로 잘못 읽히기 시작해 언제부턴가 ‘우토로’로 불리기 시작했다. 고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지사의 발언으로 논란이 된 ‘삼국인(三國人)’, 그리고 그 중에서도 ‘조선인’들의 슬럼가. 인터넷에는 우토로에 관한 이런 설명이 지금도 등장한다.
이후 우토로를 향한 차별, 멸시, 열악한 환경을 말할 때 ‘80년대까지 상수도 시설이 없었다’는 기사 한 줄로 축약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조선인 노동자로 일본의 전후(戰後)를 맞이하고 살아온 세월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우토로의 1세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고, 지금 ‘우토로의 조선인’으로서 경험을 얘기하는 건 2세들이다. 개관식 하루 전 만난 74살 서광수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서씨는 우지시가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지은 시영주택에 4년 전 입주했다. 7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은 기념관에서 사진으로만 만나볼 수 있다. 그가 사는 5층 베란다에서는 철조망과 나무 넘어 자위대 주둔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저기 야트막하게 올라온 곳이 비행장 건설 부지였습니다.” 지금의 우토로 마을을 있게 한 비행장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거리도 거리지만 그곳을 눈앞에 두고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이 어떨지 궁금했다. 김수환 우토로 민간기금재단 이사는 “일본은 우토로에서 ‘해선 안 될 일’은 하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면서 헌법에 자위대를 명기해 ‘보통국가’, ‘전쟁 가능한 국가’로 거듭나려는 일본의 모습이 우토로에 집약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토로’는 기적의 마을임이 틀림없다. 일본 시민의 수도부설 운동을 시작으로 한·일 시민의 모금운동, 한국 정부의 지원에 힘입은 땅 매입까지. 악화한 한일관계 속에서도 보란 듯이 ‘우토로 조선인’의 후손들을 위한 시영주택이 건설되고 있고, 기념관까지 문을 열었다.
“교토비행장 공사는 나라의 일이기 때문에 절대 징용될 일이 없다. 집도 대주고, 가족이 같이 살 수 있고, 배급도 많이 받을 수 있다.” 우토로평화기념관이 제작한 소식지에서 1세 문광자 씨의 말을 접했다. 기념관은 1300명 가량의 조선인들이 어떻게 우토로까지 오게 됐고, 이 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일본 땅에서 고통받고 살아온 조선인에 대한 기록과 기억을 넘어 우토로의 궤적을 통해 일본의 전쟁 책임을 정면으로 지적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 80년이 걸렸다. 우토로 운동가들은 우토로가 ‘작은 통일’을 이뤘다고 말한다. 결코 작지 않은 우토로의 성과가 이 표현에도 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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