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의 실패: 좌파에 손짓하는 시장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올해 브라질 제1의 부호로 평가한 기업인 조르지 파울루 레만은 최근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하버드-MIT 공동주최 세미나에서 “내년에는 브라질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며, 아마도 새로운 대통령을 보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거론되는 유력 대선주자 가운데 특정인을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이 묻어나는 발언임에는 틀림없다. 브라질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경제단체인 상파울루주 산업연맹은 일찌감치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거리를 두면서 애써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2019년 초 취임과 함께 감세, 공기업 민영화, 연금 개혁, 투자 확대, 노동시장 경직성 완화, 기업 경쟁력 강화 등 시장친화적 정책을 약속했다. 극우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충격을 감안하더라도 보우소나루 정부는 성장 동력을 되살리지 못했고, 정치·사회적 갈등 조정에 실패하면서 금융시장의 혼란을 자초했다.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정 운영 방식은 그를 지지한 중도 진영과 시장 엘리트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했다. 환경·인권 문제에 대한 미숙한 대처와 정치적 성향에 기울어진 편협한 외교는 국제사회에서 브라질을 고립시켰다. 올해 10월 대선에서도 군 출신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하면서 지지 기반을 스스로 좁힌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반면에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좌파 룰라 전 대통령은 2006년 대선에서 자신과 경쟁했던 인사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며 중도 진영의 지지를 끌어내는 전략을 택했다. 대선 캠페인 슬로건도 ‘희망, 브라질 재건, 국제사회에서 역할 강화’로 정해 현 정부와의 차별화를 강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룰라 전 대통령이 극우 정권의 실패와 시장의 우호적 반응 때문에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이 집권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8년간 브라질 경제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 점이 그에 대한 시장의 평가를 우호적으로 만드는 측면도 있다.


브라질 제1 부호가 말한 새로운 대통령이 중도 진영에서 나올 수도 있다. 극우도 좌파도 거부하는 중도 표심에 기대를 걸고 후보 단일화에 성공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원내 의석을 가진 정당이 20개가 넘을 정도로 전형적인 다당제 국가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파괴력을 가진 후보 단일화가 이뤄질 가능성은 낮다.


결국 판세는 보우소나루와 룰라의 ‘강대강 대결’ 양상으로 가고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집권하면 정상적인 임용 절차를 거치지 않고 보우소나루 정부에서 요직을 맡은 군 출신 8000명을 내쫓겠다고 밝혔다. 국영에너지회사 민영화 움직임을 두고는 국익에 절대적 가치를 가진 전략기업을 망치려는 시도라며 반박하는가 하면, 노동법 개정으로 고용 창출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며 재개정을 약속했다. 이에 맞서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올해 대선을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 규정해 좌파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고 있다. 여론조사 지지율 격차가 갈수록 줄고 있는 사실을 들어 재선을 자신하고 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동안 룰라 전 대통령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으나 지금은 10%포인트 안팎으로 좁혀진 상태다. 이에 따라 1차 투표에서 승부가 나지 않고 결선투표까지 갈 것이며, 박빙 대결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올해 브라질 대선은 시장이 우파(극우) 후보를 멀리하고 좌파 후보에게 손짓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과거 대선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동운동가 출신의 룰라가 승리하자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대외신용도가 하락했던 일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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