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옴표 저널리즘'에 사라진 장애인 이동권 문제

[핫이슈] 정치인 발언 '경주마 보도'… 본질 사라지고 대립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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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전장연에 사과할 일 없어…오히려 사과받아야”
-이준석 “전장연에 사과할 일 없다…사과하면 받아줄 것”
-이준석 “특수관계인들이 날 여성, 장애인 혐오라 지적”


5일 하루 동안 언론에 보도된 기사들 제목이다. 여기 적은 건 일부일 뿐, 유사한 제목과 내용의 기사가 여러 언론에서 보도됐다. 이날만이 아니다. 이미 열흘 넘게 비슷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종의 패턴도 보인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장애인 이동권 보장 요구와 지하철 시위에 대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뭐라고 주장했다→이를 전장연 혹은 다른 누군가가 비판했다→이준석 대표가 다시 무슨 말로 응수했다’로 전개되는 식이다. 상반되는 주장과 발언이 시시각각 보도되며 전장연의 시위는 어느 때보다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장애인의 이동권 등 권리 보장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는 사라지고 ‘대립’ 구도만 남았다.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앞줄 오른쪽)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대표가 28일 서울 중구 충무로역 3호선에서 전장연 및 시민단체의 장애인 이동권 보장·장애인 권리예산 반영 요구 시위인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에 참여한 뒤 승강장에서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장연 시위가 ‘핫이슈’로 등극한 데는 역설적으로 이준석 대표의 공이 컸다. 전장연은 지난해 12월6일부터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지하철 출근길 선전전을 시작했는데, 한동안 언론 보도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난 2월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시위 현장을 찾고, 이를 계기로 전장연이 22일 만에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접었을 때 반짝 솟았던 언론 보도량은 지난달 25일 이준석 대표가 페이스북에 전장연 시위를 비판하는 글을 쓴 뒤로 본격 급증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에서 ‘전장연’을 검색한 결과 지난해 12월6일부터 4월5일(오전 11시 기준)까지 54개 언론사에서 보도된 기사는 모두 964건으로 확인됐다. 검색 결과의 연관어를 분석해보니 전장연 단체명과 ‘장애인’, ‘지하철 시위’ 순으로 연관성이 높게 나왔는데, 그 뒤를 이은 것이 ‘이준석 국민’과 ‘이준석 대표’였다. ‘페이스북’은 9번째로 연관성이 높은 단어였다.


실제 전장연 관련 보도에서 이준석 대표가 차지하는 ‘지분’은 컸다. 전장연이 지하철 출근길 투쟁을 재개한 지난달 24일부터 4월5일까지 ‘전장연’으로 검색된 기사 733건 중 ‘이준석’이 언급되지 않은 기사는 85건에 불과했다. 전장연 기사의 88%가 이준석 대표를 언급했다는 뜻이다. 이중 상당수는 이 대표가 방송 인터뷰나 페이스북에서 전장연의 시위를 두고 한 발언과 그런 이 대표의 발언을 비판하거나 반박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단순 전달한 것이었다. 때로 진위 확인이 필요한 발언도, 혐오성 발언도 일단 따옴표 안에 들어간 채로 여과 없이 보도됐다. 이 과정에서 전장연이 왜 많은 시민에게 불편을 주면서까지 지하철 시위를 하는가에 관한 설명은 대체로 생략되고, 시민 불편이라는 현상만 남았다. 언론인권센터가 지난달 28일 논평에서 “전장연 시위에 대해 찬반 논란이 발생하고 더 나아가 혐오성 발언이 터져 나오는 것에는 커뮤니티 글과 정치인 발언 옮기기에 급급한 한국언론의 책임이 존재한다”고 지적한 이유다.


흔히 ‘따옴표 저널리즘’이라고 부르는 이 같은 보도를 두고 제이 로젠 뉴욕대 교수는 ‘He said, She said 저널리즘’이라 명명한 바 있다. 언론이 공적인 논쟁을 뉴스로 다루면서 어떤 주장이 사실에 부합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행태를 지적하며 한 말이다. 요컨대 ‘민주당이 이렇게 주장했고, 공화당은 저렇게 주장했는데, 우리는 누가 옳은지 모르고, 판단은 당신(독자)이 하라’는 식의 보도는 무책임하다는 비판이다.


전장연 시위 관련한 상당수의 보도 역시 이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세훈 시장 취임 이후 전장연의 시위가 격렬해졌다”, “국민의힘과 전장연이 많은 것에 대해 합의하고 실제 추진해서 성과가 있었다” 같은 이준석 대표 발언을 팩트체크한 기사는 소수에 불과했고, 대립하는 발언들을 일차적으로 옮기는 데 급급한 보도가 온라인상에선 주를

이뤘다.


‘장애인 활동가가 휠체어 바퀴를 지하철 승강장과 열차 사이에 끼워 넣어 열차 운행을 방해했다’, ‘전장연 시위 때문에 승객이 할머니 임종을 놓쳤다’ 같은 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 기사들은 서울교통공사가 제공한 보도자료만을 근거로 작성됐고, 같은 기사 안에서 현장 취재나 크로스체크 등 사실 확인을 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뒤늦게 교통공사가 이런 보도자료를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 전략의 하나로 활용한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결과적으로 언론은 공사의 여론전에 이용된 셈이나 다름없게 됐다.


지난달 28일 전장연 시위 현장을 찾아 이 대표 대신 사과한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같은 날 KBS ‘사사건건’에 출연해 “이 시위의 방법을 누구도 옳다고, 너무나 좋은 방법이라고 박수칠 사람은 없다”면서도 “정책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했던, 정말 당연한 권리를 정치계에서 관심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어도 충분치 못하다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지난 1일 모니터 보고서에서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 요구가 20년간 계속된 데에는 언론의 무관심도 한몫했다”라고 지적한 뒤 “갈등을 조장하는 보도가 아닌 공동체 내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 해결 방안을 적극 이끌어내는 공론장으로서 역할도 중요하다”며 “(지하철 시위로 인한) ‘지각 속출’만 보도할 게 아니라 ‘지각 속출’을 막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지를 화두로 던지는 보도가 많아질 때 공론장은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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