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H2’ ‘다이아몬드 에이스’ 같은 일본 만화를 안다면 ‘고시엔(甲子園)’이란 단어는 낯설 수 없다. 전국 4000여개 야구팀이 우승기를 놓고 경쟁하는 일본 최대 고교야구 대회는 십대들의 땀방울, 눈물, 노력으로 대변되는 ‘청춘의 상징’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돼 있다. 다만 늘 세상은 단편적인 이미지보다 복잡하다.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러니까 일본 사회의 여러 맥락이 고려될 때만 온전히 제 모습을 알 수 있는 고시엔을 어떠한 동경이나 환상 없이 그 자체로 들여다보려 한다.
국내 최초 고시엔 관련 서적이란 타이틀을 점한 책은 ‘100년 역사의 고교야구로 본 일본의 빛과 그림자’란 부제를 충실히 따른다. 실제 고시엔이 일본 사회에서 기대 받는 지점은 “이 공 한 개에 건 여름”(2008년), “자신의 진심과 만나는 여름”(2020년) 같은 역대 고시엔 캐치프레이즈에서 잘 드러난다. 다만 저자는 일본 고교야구의 독특한 지위와 사회 분위기를 전하며 이렇게 적는다. “고시엔을 주최하는 아사히신문사와 마이니치신문사를 비롯해서 NHK 등 많은 TV방송사들이 (중략) 어른들의 시선을 통해 (중략) 빡빡머리를 한 채 무조건 전력질주를 하는 모습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겨도 눈물, 져도 눈물이란 청춘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는 것.”
열광은 늘 현실의 한 면이다. 그렇게 저자는 ‘아날로그 문화’, ‘매뉴얼 사회’, ‘갈라파고스 사회’, ‘수직사회’ 등 일본 문화 특성이 고교야구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그 명암이 무엇인지를 살핀다. 야구규칙과 문화부터 두발변화, 교가합창, 전지훈련, 금속배트 사용, 아마추어 심판운용, 각종 해프닝까지 방대하고 객관적인 디테일을 재료로 야구란 거울에 비친 일본을 보려한다. 예컨대 저자는 고시엔이 남학생들만의 축제라고 지적한다. 일례로, 여자야구 강국인 일본에서도 중학교 시절부터 천재로 알려져 온 투수 시마노 아유리는 역대 최고선수란 평을 받으면서도 고시엔엔 출전할 수 없었다. ‘여자 매니저’ 자체도 일본에만 존재하는 제도다.
일본 사회 시스템이 스포츠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과 통찰은 결국 국내 스포츠계가 돌아볼 지점과 맞닿는다. 앞선 시마노 선수와 별개로 국내에선 고교 최초 여자선수 안향미, 대학 최고 여자선수 김라경이 진학·진로를 두고 어려운 길을 걸어온 현실은 대표적이다. 나아가 스포츠와 교육의 조화,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의 공존이란 스포츠계 과제에 시사점을 남긴다. 저자는 이런 문제를 두고 ‘일본 고교야구 감독 대부분은 영어·수학 선생님이 맡는다’ ‘모든 선수가 수업 결손 없이 공부와 야구를 병행한다’처럼 단편적이거나 잘못된 주장이 횡행하는 데 우려를 드러낸다. 특히 “국내에서 고시엔을 소비하는 방식이 저마다 필요에 따라 왜곡되어 있다”는 게 핵심이다.
책은 일본문화에 대한 이해와 스포츠에 대한 전문성을 함께 갖춘 이만 쓸 수 있는 콘텐츠에 가깝다. ‘야구장 흙을 퍼가는 전통 때문에 봄과 여름 고시엔을 합쳐 선수들이 퍼가는 흙 양이 2톤’에 달하고, ‘고시엔 야구장 상징인 검은 흙은 야구공과 구분이 잘 되게 흰 모래에 일부러 화산재 성분이 많은 가고시마 흙을 섞어 만든다’는 꼼꼼한 취재에서 저널리스트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결국 “고시엔은 단지 하나의 야구대회가 아니다”란 한 문장이 책 한 권으로 다시 쓰였다. 25년차 KBS 스포츠 기자이자 야구팬으로선 왜 국내 고교야구가 위기를 맞게 됐는지, 다시 부활할 순 없는지 오랜 기간 마음 속 의문의 답을 찾는 도전이기도 했다. 확실히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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