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국민만 보고 통합의 정치 하겠다”는 일성에 담긴 뜻이 5년 내내 변함없길 바랍니다. 국민이라는 큰 단어가 성별·세대를 막론하고 어떤 소수자성을 가진 이들까지도 구분 없이 품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오늘 당선인께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기다리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의 일화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조혼을 한 이 90년대생 여성은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온몸의 멍과 피딱지 상처를 모두 휴대폰으로 찍어뒀는데, 사진을 남겨놓고 목숨을 끊을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을 따라 외출하게 됐고 혼란한 틈을 타 한국행 비행기로 도망칩니다.
‘집안 문제로 난민 신청이라니, 너무 극단적’이라 생각하시나요. 그곳에서 여성은 남성 보호자 없이 외출도 할 수 없습니다. 지구상에서 여성의 운전을 금지한 마지막 나라였기에, 2018년 한 여성 운동가는 혼자 운전대를 잡았다가 ‘테러방지법’으로 수감됐습니다. 이런 곳에서 여성 혼자 경찰서에 찾아가 가정 폭력을 신고한다?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이 여성이 겪은 억압은 ‘구조적 성차별의 결과’인가요, 아니면 ‘운이 안 좋게 폭력 남편을 둔 이의 개인사’인가요. 이 부조리는 가해자를 단죄하고, 재교육하면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성이 겪은 폭력은 법과 제도는 물론,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이슬람 종교와 여성 혐오 문화의 총체적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2015년에서야 여성 참정권을 보장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여권이 제한된 국가를 예로 설명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당선인께서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진단한 한국의 어떤 수치는, 이들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최근 회계법인 딜로이트가 기업 이사회의 젠더 다양성 등을 분석한 보고서는 카타르, 사우디, 쿠웨이트, 한국, 아랍에미리트 등 5개국을 ‘최하위 그룹’으로 분류했습니다. 수치를 모두 나열할 순 없지만, 매년 발행되는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고서에 따르면 고용, 임금, 가사노동, 여성 폭력 등 전방위에서 성차별과 불공정이 가득합니다. 한국에서 운전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여성 운전자에겐 ‘김여사’라는 멸칭이 쉽게 붙습니다. 왜 이런 부조화가 일어나는 걸까요.
바로 ‘구조적 성차별’은 법과 제도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육아와 가사는 여성의 몫이라 학습한 가정 안에서, 전원 남성으로 이뤄진 면접장에서, 견고한 남성 중심 질서를 만들어 놓고선 여성이 진입하지 못하는 것을 ‘능력 차이’라고 단단히 믿는 조직 안에서,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만 보는 분위기 속에서 등 온갖 평범한 상황에서 ‘구조적 성차별’은 위력을 떨칩니다. ‘전통’ 혹은 ‘관행’이라는 이름을 달고, 투명한 ‘유리’처럼 말이죠. 전 세계적으로 재론의 여지가 없는 ‘구조적 성차별’의 존재를 논의의 테이블에 올린 것만으로, 한국의 성평등은 수십 년 퇴행했습니다.
당선인께서는 이미 여성의 기회가 두루 보장되어 있어, 개별 불공정 시정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시지요.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는 오랜 학습 끝에, 사회가 ‘구조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일말의 노력이 ‘여가부’와 ‘성인지 예산’이었습니다. 모두 폐지가 예고되었죠. 그럼에도 그 ‘개별 시정’ 원칙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적용되어야 할 곳이 있습니다. ‘서울대·중년·남성’이라는 구태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인수위입니다. 27명 중 4명(14.8%)만이 여성인 그 불공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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