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다고 사표 내지 말고 버티자.” 1990년대 초, 금융계와 정계 등에서 ‘잘 나가는 여성들’을 초청해 그들의 성공담을 들은 뒤, 여기자클럽이 마무리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은 고작 이랬다. 성차별을 뚫고 살아남으려면 전략이 필요한데, ‘버티기’ 외엔 길이 없다는 ‘김빠진 선언’이었다. 당시는 능력과 야망을 가졌으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시대의 한계, 가정과 일이라는 이중의 부담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많은 여성 기자들이 언론사를 떠났던 때였다.
장명수 전 한국일보 사장은 버틴 사람이었다. “입사 동기가 부장일 때 같은 부서의 차장으로 일”하면서도 “입사 21년 만에 문화부장이 되”면서도 “그 후 부국장, 국차장, 국실장 등으로 발령받아 편집국 한쪽에서 11년을 앉아 있는 동안 후배 3명이 편집국장이 되는” 걸 지켜보면서도 그는 버텼다. “편집국 한쪽에 놓여 있는 가구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1998년과 1999년, 한국일보 주필과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건 ‘견디자, 버티자, 사표 내지 말자’는 선언의 힘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펴낸 <유리는 깨질 때 더 빛난다>엔 그와 같은 사례가 수두룩하다. 여성 기자 31명은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편견과 구태, 관습, 혐오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 담담하게 풀어냈다. 특히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많았다. 장명수 전 사장은 “1960년대만 해도 가정란을 만들기 위해 여기자를 한두 명씩 뽑아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등에 배치했지만 그 무렵 사회부 여기자의 유일한 출입처는 창경원(현 창경궁)이었다”며 “각 사의 여기자들이 창경원을 출입하면서 곰이나 원숭이가 새끼를 몇 마리 낳았고, 밤 벚꽃놀이가 언제 시작된다는 등의 기사를 썼다”고 했다.
김정수 전 중앙일보 기자에 따르면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사 여성 기자 대부분은 입사 후 한 번쯤 문화부나 생활부를 거쳤고, 문화부에서 대중문화나 문학 등의 분야를 담당하더라도 대부분 가정면에 들어갈 기사를 함께 맡았다.” 김순덕 동아일보 대기자 역시 수습 한 달쯤 뒤 생활부로 가는 바람에 “남자 동기들 다 하는 경찰기자를 하지 못 해 지금까지 오랜 콤플렉스로 남아 있다”고 했다. 편집에도 예외는 없어 “가끔 여성 수습기자들이 들어오면 주로 문화면이나 섹션지면 등 가벼운 연성 뉴스 지면을 맡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박미정 조선일보 편집부 차장은 기억했다.
부서 배치, 출입처 배정, 승진 등에서만 차별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신동식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은 “1960~1970년대에는 여기자가 결혼하면 신문사에서 사표 받는 것이 거의 관행이었다”며 “서울신문은 신문사 중에서 드물게 결혼해도 사표를 내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었지만 출산휴가는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아 전적으로 편집국장 결정에 달려 있었다”고 썼다. 그는 이 때문에 첫째와 셋째 출산 때 회사를 그만두고 재입사를 해야 했다. MBC 첫 공채 여기자로 입사한 홍은주 전 iMBC 대표이사도 “인사부 사람들이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둔다는 내용의 서류에 사인하라고 해, 끝까지 거부하는 것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경찰서 출근을 위해 이른 새벽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여자가 첫 손님으로 타면 재수 없을까 그냥 지나치는 택시들에 “내일부터는 남장이라도 해야 하나(한수진 전 SBS 국장)” 고민했다는 일화나 “대뜸 ‘미스 유, 커피 한 잔 타와’라는 선배(류현순 전 KBS 사장대행)” 이야기는 위 사례들에 비하면 그나마 웃어넘길 일일지도 모른다.
본질적 차별 속에 여성 기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했다. 김혜례 KBS 심의위원은 “남성 기자의 2배는 일해야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는 선배들의 충고를 자주 떠올렸다고 했고, 권태선 전 한겨레신문 편집인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으려면 최소한 3배는 더 유능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하여 악착을 떨며 공부했다”고 썼다.
‘첫 여성 특파원, 첫 여성 편집국장, 첫 여성 청와대 출입 기자, 첫 여성 메인앵커’는 그 분투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첫 여성 특파원인 윤호미 전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은 “1985년 정식 발령이 나자, 여기자클럽에서 ‘해외 명사를 인터뷰할 때 입으라’고 짙은 보라색 치마에 연한 옥색 저고리의 한복을 선물해줬는데 막상 파리에 도착하니 한복 입고 인터뷰 간다는 것이 얼마나 해외 물정에 어두운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됐다”며 “그 한복은 파리에서는 한 번도 못 입었다. 여성이 혼자 해외에 부임해 일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최초라는 ‘왕관의 무게’를 견딘 여성 기자들 덕분에 지난해 10월 기준, 워싱턴 여성 특파원은 11명으로 전체 특파원단의 30% 가까이를 차지하게 됐다. 여성 편집국장과 여성 청와대 출입 기자, 여성 메인앵커 역시 이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언론계에는 더 이상 깨질 유리천장이 없는 것 같다”는 말도 나온다. 그만큼 우리 언론계와 우리 사회가 성 평등해진 것일까?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젊은 여성 기자들 역시 새로운 도전과 모습을 달리한 차별과 싸우며 또 다른 전쟁을 벌이고 있어서다. 김효은 중앙일보 듣똑라팀장은 “‘듣똑라는 왜 여성 기자만 진행하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며 “그만큼 여성이 공적인 자리에서 정치를 논평하고,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낯설다는 뜻일 터”라고 썼다. 이혜미 한국일보 커넥트팀 기자도 “2015년, 첫 직장인 부산일보에서 ‘기자’라는 명함을 갖게 된 순간 ‘여기자는 말이야’라는 허깨비 같은 성차별 프레임과 자기검열에 맞서, 평생 스스로를 증명해 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나 “힘겹게 걸어왔던 비포장의 험로에서 이젠 좀 벗어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화난다고 사표 내지 말고 버티자”는 선언도 어느샌가 “끝까지 우아하게 버티자”는 다짐으로 바뀌었다. 박정경 문화일보 기자는 이렇게 썼다. “이것저것 다 포기하고 일에만 올인해 데스크 자리에 올랐다는 여성 기자의 성공 사례보다는 아주 평범한 여성 기자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다양한 부서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자리를 지키는 여성 기자들의 목소리가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할 때, 그 풍부함만으로도 누군가는 이 업을 포기하지 않고 일터로 나올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끝까지 우아하게 버티자,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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