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보도가 실종됐다는 말은 매 선거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특히 ‘역대 최악의 선거’로 불리는 이번 대선에선 후보 개인의 자질 논란 등으로 정책 검증이 더욱 부족하고, 있더라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26개 언론·시민단체가 결성한 2022 대선미디어감시연대는 지난 11일 포털의 ‘많이 본 뉴스’들을 분석한 결과, 정책 정보가 없는 기사가 전체 기사의 90%에 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일부 언론사들은 꾸준히 정책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유권자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선거인만큼 언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다. 특히 후보들이 정책을 공개하면 이를 검증하는 하향식 구조를 넘어서, 시민들이 먼저 후보들에게 주요 정책이나 구체적인 공약을 요구할 수 있도록 상향식 시스템을 마련한 언론사들이 눈에 띈다.
한겨레신문은 대선 후보보다 유권자들의 말에 더 주목하겠다며 올해 초부터 ‘나의 선거, 나의 공약’ 기획을 보도하고 있다. 향후 한국 사회를 꿰뚫을 6가지 의제를 정한 뒤, 그 의제와 삶이 맞닿은 유권자 100여명을 심층 인터뷰해 그들이 요구하는 공약을 대선 후보에게 보내고 답변을 받고 있다. 첫 번째 의제였던 기후위기를 시작으로 한겨레는 그동안 부동산, 플랫폼 노동과 경제, 성 평등, 돌봄 복지 등 5가지 주제를 1~2주일 간격으로 지면에 비중 있게 게재했다.
기획을 총괄하고 있는 이재훈 한겨레 기자는 “이전에도 ‘대선 만인보’ 같은 유권자 참여형 대선 기획을 해왔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현 편집국장단의 제의로 이번 기획을 시작하게 됐다”며 “취재를 시작하기 전엔 유권자들의 정책 이해도가 떨어질까 상당히 걱정했는데, 제 착각이었다. 정책 이해도 높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의지도 상당히 강해서 유권자들이 정책 관련 보도를 많이들 소구하시는구나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이번 기획을 위해 별도의 TF가 아니라 각 주제별로 정책 전문성이 있는 6개의 팀을 순차적으로 꾸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기자들도 정책별로 전문성에 차이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심층 인터뷰 역시 가능한 한 해당 의제와 이해관계가 없고 정치 성향이 자유로운 유권자를 섭외하고자 노력했다.
이재훈 기자는 “이전의 기획과는 다르게 가급적 실명과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분을 우선해서 섭외하자는 나름의 합의가 있었다”며 “의견들이 워낙 다양해 취재한 양보다 독자들에게 알리는 내용이 적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디지털에선 후보들의 답변 전문을 공개하는 등 유권자들에게 후보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고 했다.
한겨레는 위 기획과 함께 지난달 중순부턴 ‘청년 5일장’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유권자 기획도 진행하고 있다. 만 18~35세 청년 110여명과 각 대선 캠프들이 한겨레가 마련한 온라인 공간에서 직접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기획이다. 송호진 한겨레 디지털미디어부문장은 “대선 때가 되면 많은 언론사들이 관련 페이지를 만들고 후보들의 스토리나 정책을 소개하는데, 우린 그런 방식보다 유권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했다”며 “사실 사람들이 언론사 사이트에 많이들 안 들어오는데 조금 더 머물고 갔으면 좋겠다, 또 언론사 사이트가 정치와 시민,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론장이라는 긍정적 기능을 조금이라도 복원했으면 하는 마음에 이번 기획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청년 5일장은 이재명·심상정·안철수 대선 후보가 제안한 기본 주택과 주 4일제, 연금개혁에 이어 현재 한중 관계와 관련해 토론을 벌이고 있다. 110여명 가운데 토론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20~30명으로 예상보다 적긴 하지만 대선 후보들이 댓글로 “정신이 번쩍 든다”고 쓸 만큼 토론 내용은 깊고 뜨겁다. 송호진 부문장은 “다음 주에는 메타버스 공간에 청년들을 초청해 토론할 계획”이라며 “이번 기획에 실험적 성격도 있는 만큼 어떻게 하면 참여율을 높일지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KBS가 올해 초부터 보도하고 있는 ‘당신의 약속, 우리의 미래’ 기획도 유권자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우리 사회 가장 중요한 의제가 무엇인지’를 직접 국민들에게 물어 10대 의제로 압축해서다. 송현정 KBS 정치부장은 “정책 보도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엔 다들 공감하지만 정작 보도를 하면 외면 받는다는 편견들이 있는 상황이어서 어떻게 하면 보게 만들지, 작년 9~10월 경선 국면부터 그 기준과 틀을 고민했다”며 “일차적인 의제 스크리닝을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와 했고 추려진 의제들을 일반 국민 1000명 여론조사를 통해 10개 주제로 확정했다. 그 의제들을 각 후보 측에 질의한 후, 후보 간 차이가 별로 드러나지 않으면 세부 방식을 되묻고, 전문가와 기자들이 협업해 정책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획은 메인 뉴스인 ‘KBS 뉴스9’에서 10분 안팎으로 다뤄지고 있다. 지상파 뉴스로선 굉장히 긴 시간이다. 부동산, 저출산 등 앞으로의 주제들에선 추가 여론조사를 진행해 유권자들의 데이터를 정책 검증 보완용으로 삼을 계획이다. 임장원 KBS 통합뉴스룸국장은 “공약에 디테일이 있어야 그 공약이 현실성이 있는지 따져 묻고 검증할 수 있는데, 현재 대다수 공약이 그 수준까지 제시하지 않고 있다”며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지금까지 나온 재료들로 유권자들이 후보를 선택할 수 있도록 비교·분석을 하고 있다. 역대급으로 혼탁하고 네거티브가 난무하고 있는 대선 판이지만 정책 중심으로 바꿔보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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