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들은 서재에 꽂힌 아버지의 신문 스크랩북을 꺼내 보곤 했다. 스크랩된 기사와 그 옆에 쓰인 아버지의 시와 글은 어렵기만 했다. 대신 ‘고바우 영감’, ‘두꺼비’ ‘나대로 선생’ 같은 4컷 만화에 눈길이 갔다. 기자가 된 아들은 전시를 통해 아버지의 손때와 세월의 흔적이 묻은 스크랩북을 공개했다. 고(故) 고봉성씨가 만든 34년 치 신문 스크랩북 36권이 하나의 작품이 된 순간이었다.
고봉성씨는 26살 청년 시절이던 1959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92년까지 한국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기사를 오려 붙이고, 자신의 견해를 남겼다. 가위와 풀도 구하기 쉽지 않은 때였다. 아들인 고경태 한겨레 이노베이션랩 실장은 “가위 대신 30cm 대나무 자를 대고 신문을 찢고, 풀죽을 쑤어 기사를 붙였다”며 아버지가 스크랩하던 모습을 회상했다. 평생을 목회자로 일했던 고봉성씨는 정성껏 신문을 매만지고, 자신만의 글을 기록하며 여가를 보냈다. 고씨는 스크랩북에 ‘묘비’(墓碑)라는 제목을 붙였다.
고씨의 스크랩북은 서울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리는 전시 ‘웨이팅 포 더 선’(Waiting for the sun) 속 ‘당신은 나의 태양’ 코너에서 볼 수 있다. ‘노동과 여가’를 주제로 열린 기획전이 주목한 것은 34년간의 신문 스크랩을 통한 고씨의 여가 생활이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최윤정 큐레이터는 “전시 제목에 있는 ‘선’(sun)은 노동과 여가의 가치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봉성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신문 스크랩북을 만들며 당신의 여가를 보냈을 텐데 직접 쓴 글을 보면 역사에 대한 성찰이 어마어마하다”며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선’(sun)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로 봤다”고 설명했다.
전시된 스크랩북에는 4·19혁명, 보릿고개, 10·26사태, 이한열 열사 장의행렬 등 한국 사회의 주요 역사 속 상황이 담겨 있다. ‘최영오 일병 사건’(1962년), ‘장성 탄광 참사’(1977년) 등 고씨가 주목했던 당시 사건·사고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장성 탄광 참사를 다룬 <무모가 빚은 이중 참변> 기사와 <노동시간 세계 최고, 임금은 5~13배나 낮아> 기사를 함께 배치하고, ‘일하는 기계’라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사람은 일하는 동물이다/기계처럼 소리를 낸다/배곯은 소리/탄식의 소리/절망의 소리/모두가 죽어라고 소리를 낸다/사람은 일하는 기계/부자는 놀고먹고/노동자는 울고먹고/고달프고 외롭게 울고 웃는다.’ 고씨는 “도화지에 고리를 묶고, 나무판을 앞뒤로 대어” 직접 스크랩북을 만들었는데 사진 기사와 4컷 만화 등을 콜라주해 디자인한 표지도 감각적이다.
과묵한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아들은 한 번도 아버지에게 왜 스크랩북을 만드는지, 제목을 왜 묘비로 지었는지 물어보지 않았을 정도다. 당시는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재발견한 건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긴 스크랩북을 들여다보면서다. 고경태 실장은 지난 2013년 아버지가 남긴 신문 스크랩북 속 내용을 재구성해 책 ‘대한국민 현대사’를 펴냈다. 이번 전시는 스크랩북을 NFT로 보존할 방법을 찾다 전시 기획자와 연결이 되며 참여하게 됐다.
고경태 실장은 “사회에 나가 한창 바쁠 시기인 27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대개 30~40대는 돼야 아버지의 세계가 궁금하지 않냐”며 “재미없고, 보수적인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그 시대에서 가장 젊은 매체이고 진보적인 한국일보를 주로 구독할 정도로 진보적인 면도 있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본인이 그냥 좋아서 한 취미생활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독창적인 세계였다. 스크랩북이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날 것 그대로 공개돼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고봉성씨가 작가로, 고경태 실장이 자료 제공자로 이름을 올린 기획전 ‘웨이팅 포 더 선’은 문화비축기지 T5 이야기관에서 5월8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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