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우리의 일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끼어들어 가지고 새로운 경험을.. 진짜 감동이에요.”
집안일과 바깥일을 오가며 평생을 일했다. 하루도 일을 쉰 적은 없지만, 그 일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럴듯한 명함 한 번 가져본 적 없고 이름 대신 ‘집사람’ 혹은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게 익숙했다. 그런 여성들에게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와 육아 전문가라고, 소통 전문가라고, 직함을 붙여주고 명함도 선물했다. 환갑이 넘어 생애 첫 명함을 받아든 그녀들은 “나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며 “이런 느낌이 들게 해줘서 고맙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 ‘이상한 사람들’은 바로 경향신문 젠더기획 특별취재팀 기자들이다. 이들은 노인세대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자는 의도로 지난달 26일부터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란 제목의 젠더기획을 연재 중이다. “너무 흔해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로 치부”됐던 육칠십대 여성들의 노동사를 매주 한 차례 인터뷰 기사와 데이터 기사, 영상으로 공개하며 공감을 얻고 있다.
콘텐츠 유료화를 실험하는 동시에 좋은 콘텐츠를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에 연재 첫날 텀블벅에 오픈한 크라우드펀딩 역시 ‘대박’ 행진이다. 책과 엽서, 신문광고 제작 등 다양한 리워드로 구성된 펀딩은 오픈 1시간 반 만에 목표금액 300만원을 채우고 8일 현재는 3600만원(1200%)을 돌파했다. 특히 70명 한정으로 준비된 신문광고 리워드는 10만6000원짜리 고가 구성이 포함됐음에도 6시간 만에 ‘완판’되는 기록을 세웠다. 쏟아지는 재진행 요청에 지난 4일 다시 70명 한정의 신문광고 포함 리워드를 추가로 열었는데, 이 역시 이미 절반 이상이 팔려나갔다. 텀블벅 펀딩 자체가 처음이라 “목표를 다 이룰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는 장은교 팀장은 폭발적인 반응에 얼떨떨하다며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경향은 마지막 5회차 기사가 나가는 다음 달 2일과 4일에 각각 신문 2개 면을 털어 후원자들이 자신의 엄마에게, 누나 혹은 누이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면 광고로 게재할 계획이다. 비록 180자의 짧은 문구이지만, 이 광고에 담긴 진심이 그들에겐 최고의 선물이며, 이런 광고를 실은 신문은 세상 하나뿐인 ‘굿즈’(상품)가 될 것이다. 장은교 팀장은 “아직까지 신문을 좋은 소재로, 좋은 매체로 봐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게 기쁘다”고 했다. “지면이 아직 매력적이구나, 저희끼리 그렇게 얘기하곤 해요. 신문 기자들이 내부적으로 지쳐 있기도 하고 지는 산업이란 말도 있잖아요. 우리 아직 경쟁력이 있다고, ‘으쌰으쌰’ 하는 계기도 되는 것 같습니다.”
애초 이 기획은 소통·젠더데스크인 장 팀장의 막연한 구상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최종 기획의 제목이 된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문장만 붙들고 “지인의 팔촌까지” 몇십 명을 만나며 인터뷰이를 물색하던 장 팀장은 지난해 10월 남대문시장에서 국숫집을 하는 손정애 씨를 만난 뒤 사내 게시판에 기획안을 올렸다. 노년 여성의 삶을 노동자의 관점에서 기록한다는 취지에 공감한 팀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그중엔 치매에 걸린 노모를 돌보는 50대 교열부 기자도 있었다.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의 노동을 기록하고 싶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팀원만 9명인, “경향신문에서는 유례없을 정도로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모인 ‘조각보팀’”이 완성됐다. 이들은 각자 부서에서 ‘본업’을 하면서도 이 기획을 위해 새벽 출근에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추가 촬영을 해가며 힘을 보탰다. 인터뷰 기사와 함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데이터 기사를 담당한 데이터저널리즘팀은 기사에서 활용한 데이터와 분석 방법을 설명하는 페이지를 따로 제작하기도 했다. 4년 전 고령층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 굴레를 조명했던 데이터저널리즘팀의 조형국 기자는 “그분들의 상황이 4~5년이 지났다고 해서 나아졌을 리가 없고 해서 마음의 짐 같은 게 늘 있었는데, 좋은 기획을 마련해주신 덕분에 더 의욕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보도 후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찾아가 더 화제가 된 1회 인터뷰의 주인공 손정애씨, 그리고 2회차 주인공 장희자씨. 이렇게 기사에 화자로 등장한 여성은 몇 안 되지만, 지난 4개월간 젠더기획팀이 만난 여성들은 수십 명이 넘는다. 취재를 다 해놓고 여러 사정으로 쓰지 못한 사연도 한가득하다. 이런 개인들의 생애사를 현대사와 잇는, 그럼으로써 구조적 맥락을 드러내는 일은 장 팀장이 제일 좋아하는 작업이자 “경향신문의 저널리즘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다. 그래서 단순히 “할머니들이 고생한 이야기로 읽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사소한 이야기에 가장 위대한 게 숨어 있다는 것”에 공감해준 독자들이 장 팀장은 고맙다. 그는 “독자나 후원자들이 이 기사를 좋아해 주시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한 명 한 명 일의 주체로서 이분들의 삶을 조명한다는 원칙이 훼손되지 않게 끝까지 잘 마무리하고 싶다”면서 “취재원 어머니들께 안 좋은 소식 없이, 다들 무탈하게, 행복한 기획으로 사고 없이 끝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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