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호반 기사 삭제 사태', 이대로 흐지부지되나
[기자총회 후에도 '편집권 침해' 침묵]
편집국 차원서도 별다른 준비 없어
사측 "기자들 '편집권 침해'라는데,
그에 대한 경영진의 생각은 다르다"
대주주 비판 기사 50여개가 일괄 삭제된 지 25일째, 서울신문 내부는 조용한 상태다. 그동안 서울신문 기자들은 기사 삭제를 결정한 사장과 편집국장 등을 비판하는 기수 성명을 연달아 냈고, 지난달 26일 기자총회 이후 기자협회 서울신문지회의 성명까지 나왔다. 기자들은 기사 삭제 사과, 편집권 독립을 위한 실질적 조치 등의 요구안을 내놓았지만 사측과 편집국은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도, 계획도 밝히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달 27일 한국기자협회 서울신문지회는 성명을 내어 ‘호반 대해부’ 기사 삭제 사태에 대해 “다시 일어나선 안 되는 중대하고도 명백한 편집권 침해”라고 밝혔다. 이어 “이 사안을 곽태헌 사장과 황수정 편집국장 등 일부가 밀실에서 졸속으로 결정하고, 문제가 공론화된 뒤에도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감 있게 설명하지도 않는 행태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서울신문지회는 △독자들에게 경위를 밝히고 사과하는 책임감 있는 조치 △곽태헌 사장의 “내부 분열을 하려는 것도 있는 것 같다”, “경고한다. 두 번 기회는 없다” 발언에 대한 유감 표명과 6인 협의체의 근거에 대한 설명 △김균미 편집본부장의 입장 표명 △편집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실질적 조치를 단체협약 등에 명시 등을 요구했다. 강국진 지회장은 “설 연휴가 이제 막 끝나기도 해서 아직은 기다리는 단계”라고 말했다.
기자들의 요구가 수용될지는 미지수다. 지회 성명이 나온 지 2주가 지났지만 사측은 관련 논의를 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이다. 편집국 차원의 준비도 없다. 지금까지 황수정 국장은 기자들에게 지회 요구안 관련 공지를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송한수 경영기획실장은 “일단 기자들이 이번 사안을 편집권 침해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경영진의 생각은 다르다”며 “복잡다단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대응할) 생각은 있지만 정리된 건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16일 서울신문 사장, 편집인, 편집국장, 노조위원장 등 6인 협의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지난 2019년 보도한 <언론 사유화 시도 호반건설 그룹 대해부> 기사를 온라인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기사 일괄 삭제를 주도한 곽태헌 사장은 “호반이 최대주주인 회사에서 호반에 대해 악의적으로 쓴 기사가 서울신문에 그대로 남아있는 게 맞다고 생각하냐”는 입장을 밝혔다. “경영진에 의한 편집권 침해”라는 기자들 목소리에 “두 번 기회는 없다”는 사장의 경고, “기사의 진실성이 밝혀진다면 회장 직권으로 기사를 다시 게재하겠다”는 김상열 회장의 발언에 기자협회, 전국언론노조 등 언론단체의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최소한의 요구조차 흐지부지되는 분위기에 서울신문 기자들은 허탈감과 위기감을 드러냈다. 일선 기자들 사이에선 이번 사태로 인해 취재원, 타사 기자 등 외부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사기 저하가 심각한 상태다. 서울신문 A 기자는 “총회에서 기자들의 여러 가지 요구가 나온 거에 비해 성명엔 낮은 수준의 내용만 담겨 일단 거기서 허탈감이 한 번 있었다”며 “성명을 내도 유야무야 넘어갈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그 다음 스텝을 밟는 데 노조가 구심점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분위기도 아니”라고 토로했다.
기자총회에선 “삭제된 기사 원상 복구”와 이번 사태에 대해 “편집국장 직을 걸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황수정 국장은 총회에서 “내 의사가 먹히지 않아 기사가 훼손됐을 때는 직을 내려놓을 것”이라면서도 “이번 일(호반 대해부 기사 삭제 건) 관련해선 내가 직을 걸 필요는 없다고 봤다”고 말했다.
황 국장은 기사 삭제 조치와 관련해선 “(기사 삭제 결정 이틀 전) 사장 직권으로 기사를 내리겠다는 연락을 받았고, 해당 방식으로 기사를 삭제하는 건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고 말했다. 이어 “기사 내리는 걸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내려진 상황인데 내가 어떻게 했어야 되나. 그 혼란을 편집국에 가져와서 얘기했어야 하냐”며 “호반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사실 숙명이든 뭐든 준비했어야 하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서울신문 B 기자는 “이대로 그냥 지나갈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든다. 이미 서울신문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기자 사회 내부에 있었는데 거기에 더 기름을 붓는 격이 아닐까 싶다”며 “편집국장이라면 기사 삭제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사표 쓰고 나왔어야 한다고 본다. 기자총회에서 본인이 총알받이를 했다는 걸로 자기가 할 일은 했다고 넘어갈 모양인데 편집국장직과 그 다음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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