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주 비판 기사 50여건 일괄 삭제 파문에 휩싸인 서울신문 기자들이 26일 기자 총회를 연다. 기자 총회에는 황수정 편집국장도 참석해 ‘호반건설 대해부’ 기사 삭제 사태 관련 논의가 이뤄질 예정이다.
서울신문은 지난 16일 호반그룹 관련 의혹을 보도한 기사 50여개를 일괄 삭제했다. 특별취재팀이 지난 2019년 7월15일부터 11월25일까지 보도한 기사들이다. 사장과 편집국장 등이 조치한 기사 삭제를 두고 기자들의 비판 성명이 쏟아졌지만, “두 번 기회는 없다”는 사장의 경고와 “기사의 진실성이 밝혀진다면 회장 직권으로 기사를 다시 게재하겠다”는 회장의 발언이 나왔다. 기자들은 일단 이번 총회에서 어떤 얘기가 나올지 지켜보자는 분위기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영진의 행태를 본 기자들 사이에선 비판이 수용되지 않을 거라는 위기감도 팽배하다.
기사 일괄 삭제 결정에 침묵하던 서울신문 편집국을 뒤흔든 건 2019년에 입사한 52기 기자들이었다. 52기 기자들은 황수정 국장이 부장단 회의에서 기사 삭제를 공지한 이틀 후인 지난 18일 기수 성명을 내어 “사주와의 관계를 고려해 기사 게재 지속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부당할뿐더러 그 자체로 자본 권력에 의한 편집권 침해”라며 “전 경영진이든, 현 경영진이든, 소수로 구성된 협의체에서 졸속으로 기사 삭제를 결정해서는 안 됐던 일”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성명을 시작으로 46기, 47기, 48기, 50기, 51기 기자들의 성명이 속속 이어졌고, 기자들은 곽태헌 사장과 황 국장의 책임 있는 해명과 편집권 독립의 제도적 보장을 요구했다.
서울신문 안팎에서 비판 성명이 이어지자 호반 창업주인 김상열 서울신문 회장은 24일 편집국장을 통해 설 연휴 이후 기사 삭제 사태 관련 간담회를 열어 기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원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그는 지난 19일 회사 알림에서 “4개월이 넘게 반론의 기회조차 없이 지속된 일방적 기사들로 인해 호반그룹은 큰 상처를 입었다”며 “구성원 중 누구라도 원한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어서 기사의 사실 관계에 대해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기사들의 진실성이 밝혀진다면 회장의 직권으로 해당 기사를 다시 게재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기사 일괄 삭제를 주도한 곽태헌 사장은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호반이 최대주주인 회사에서 호반에 대해 악의적으로 쓴 기사가 서울신문에 그대로 남아있는 게 맞다고 생각하냐”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지난 19일 경영설명회에서 “사장된 순간부터 호반 기사를 빼려고 했다” “전임 경영진 때 결정된 사안”이라는 발언을 했다. 어차피 기사를 삭제하려고 했던 곽 사장이 전임 경영진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사태로 드러난 건 호반이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기사 삭제를 요구했고, 결국 기사 삭제는 예정된 수순대로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5월 당시 서울신문 3대주주였던 호반은 서울신문 보유지분 전량을 우리사주조합에 매각하는 대신 ‘호반건설 대해부’ 기사 삭제를 요구했다. 협상 주체로 있던 우리사주조합장, 노조위원장이 이 내용을 당시 사장, 편집국장 등에게 보고했고, 이들은 호반이 제시한 조건을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반건설 대해부’ 보도가 나간 뒤 금융당국이 호반그룹 의혹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는 점과 “반론의 기회조차 없이 지속된 일방적 기사들로 인해 호반그룹은 큰 상처를 입었다”는 김상열 회장의 발언 등을 볼 때 호반은 해당 기사들을 반드시 일괄 삭제해야겠다고 인식한 것으로 분석된다.
서울신문 A 기자는 “김상열 회장은 당시 서울신문 보도가 악의적이였다고 주장하는데 그럼 왜 이런 언론사의 사주가 된 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며 “결국 호반에 안 좋은 기사를 삭제하기 위해, 본인 입맛에 맞는 기사를 내게 하기 위해 사주가 됐다고 밖에 설명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더 큰 문제는 기자들의 의견 표명을 ‘내부 분열’ ‘반 호반 세력’이라고 모는 행태다. 곽 사장은 경영설명회에서 “호반 관련된 기사를 삭제한 것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내부분열을 하려는 것도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고, 김준 서울신문 노조위원장 또한 지난 20일 사내게시판에 올린 입장문에서 “이번 사안이 조직을 와해하려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고 했다. 또 서울신문 데스크들이 비판 성명을 낸 기자들에게 주동자와 배후를 밝히라고 요구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특별취재팀 소속이었던 한 기자는 게시글을 올려 “젊은 기자들이 무슨 이해관계가 있어 의도적으로 회사 분열을 꾀하겠냐. 의심하는 것처럼 몇몇 선배들이 특정 방향으로 선동하려 한다고 해서 선동이 되겠냐”며 “사내 이슈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어째서 ‘내부분열’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언론사는 원래 그래야 하는 조직이라고 배웠다”고 지적했다.
기자들은 이번 사태가 편집권 침해의 시작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신문 B 기자는 “사태가 벌어지고, 후배 기자들의 성명이 올라왔는데도 ‘내가 잘못했다, 내 책임이다’라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본질만 흐리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라며 “이제는 경영진이나 노조위원장이 책임질 거라고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편집국장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명확히 밝혀줘야 한다. 결국 우리가 뽑은 거고, 이 사람을 믿고 앞으로 1년은 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울신문 대주주 비판 기사 50여건 일괄 삭제 사태 타임라인
-1월16일 오전 사장, 편집인, 편집국장, 노조위원장 등 6인 협의체 기사 삭제하기로 결정
-1월16일 오후 편집국장, 부장단 회의에서 기사 삭제 조치 공지
-1월18일 전국언론노조 성명, 서울신문 52기·48기 기수 성명 발표
-1월19일 50기·51기·47기·46기 기수 성명, 한국기자협회 성명 발표. 곽태헌 사장과 김상열 회장, 기사 삭제 관련 입장문 사내게시판에 게재.
-1월24일 전국언론노조,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김상열 회장 규탄’ 기자회견 개최
-1월26일 서울신문 기자 총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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