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언론 윤리인가

[언론윤리TALK] (1) 배정근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언론윤리헌장실천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언론윤리TALK>은 취재보도 활동에서 발생하는 윤리 문제를 주제로 언론인에게 드리는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 학계와 시민사회, 언론계에서 언론윤리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온 필진이 돌아가며 격주로 집필합니다. <언론윤리TALK>은 언론 현상을 윤리 관점에서 새롭게 들여다보는 한편 언론인들이 직면하는 윤리적 갈등과 고민을 함께 풀어나가는 대화의 장이 되고자 합니다.

오늘도 끝없이 밀려오는 뉴스와 힘겨운 씨름을 하고 계실 언론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고 있는 저는 언론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과 자주 상담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먼저 왜 기자가 되려고 하는지 동기부터 물어봅니다. 이 직업의 실상을 얼마나 이해하고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답변은 각양각색이지만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는 반응이 대체로 많습니다.


확실히 한국 기자들은 개인적 선호보다 사회적 역할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사명감이 남다른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2019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인 인식조사에서도 절반이 넘는 기자(53.6%)가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어서”를 직업 선택 이유로 꼽았습니다. 반면에 2002년 미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비슷한 질문을 한 조사에서는 40%가 글쓰기, 이야기, 취재활동 같은 직업 자체의 매력을 가장 중시해 좋은 대조를 보입니다(The American Journalist in the 21st century(2007, D. Weaver et al.).

그렇다면 언론은 어떻게 사회 공익에 기여하는 것일까요? 아시다시피 언론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모습을 뉴스와 논평이라는 고유한 양식을 통해 전하는 기능을 합니다. 언론 보도는 우리의 현실 인식을 주조함으로써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진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주권자인 국민의 알권리를 대리하고, 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가치가 경합하고 타협하는 공론을 형성하며, 불의한 현실과 권력의 부패를 고발하는 역할은 언론을 민주주의의 초석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국내 언론의 현실은 기자들이 꿈꾸는 공적 역할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당장 스마트폰으로 포털의 뉴스 화면만 열어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독자의 흥미를 끌어 조회수를 높이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선정적인 내용과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넘쳐납니다. 이런 기사들은 시선을 끌어 모으는 데는 성공하지만 댓글에는 “이런 기사 쓰려고 기자가 됐느냐”는 조롱이 이어집니다.

팩트 하나를 확인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서류를 뒤적이거나 전화통에 매달리고, 현장을 발로 뛰는 걸 일상으로 하는 여러분에게는 너무나 부당한 비판일 겁니다. 기자상 심사를 해보면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뜨거운 열정으로 언론의 사명에 충실한 수준 높은 기사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놀라곤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기사들은 대부분 포털에서 뉴스를 소비하는 이용자들에게 노출되지 않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모순’은 디지털뉴스생태계의 작동 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포털 뉴스밖에 접해보지 않은 이용자라면 언론을 결코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의 광고수익 모델이 붕괴하면서 새로운 수익원을 찾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은 십분 이해하지만 최근 한국 언론은 생존 논리에 빠져 지켜야할 최소한의 원칙도 잃어버리는 ‘규범의 아노미’ 현상이 심각합니다. 뉴스의 기본인 사실 확인과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은 인터넷 게시글이나 정치인의 일방적 주장이 버젓이 뉴스로 보도되고, 한국을 대표하는 언론사들이 기사를 위장한 광고를 양산하거나 기사 대가로 광고·협찬을 주고받는 노골적 거래가 그렇습니다.

이런 가치의 혼돈 속에서 언론인들이 얼마나 내적 갈등이 많은지는 지난해 기자협회보의 한 여론조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2019년 52.0%, 2020년 46.4%, 2021년 43.3%로 매년 하락하고 1~2년 사이 사기가 저하됐다는 응답은 90.7%에 달했습니다(“기자 90.7% "최근 1~2년새 사기 떨어졌다". 2021.8.17.일자 기자협회보). 한국의 언론 현실은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 뉴스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언론,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을 찾을 수 없는 시민, 사회의 다원적 가치를 조정하고 합의를 창출하며 권력을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한국의 민주주의 등 모두가 패자가 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인터넷신문협회가 지난해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언론윤리규범인 ‘언론윤리헌장’(첨부)을 제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언론 윤리를 다시 세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시민들의 신뢰를 되찾을 수 없고, 이번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같은 강제적 규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 언론도 20세기초 옐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란 용어를 탄생시킨 극도의 상업주의의 폐해와 시민의 불신을 전국적인 신문편집인협회(ASNE) 결성과 최초의 언론윤리규범(Canons of journalism) 제정이라는 자율 노력을 통해 해결한 바 있습니다(Journalism Is a Loose-Jointed Thing”: A Content Analysis of Editor & Publisher's Discussion of Journalistic Conduct Prior to the Canons of Journalism, 1901–1922(2007, Rodgers).

언론단체나 언론사별로 이미 다양한 윤리 규정들이 있음에도 굳이 새 규범을 만든 이유는 인권과 다양성 존중 같은 우리 사회의 달라진 가치 기준을 반영하고 저널리즘의 환경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새 헌장은 실행의 주체를 ‘윤리적 언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뉴스를 만들어 전파할 수 있는 다원적 미디어 환경에서 매체나 조직과 관계없이 실제로 뉴스와 논평 활동을 하는 모든 언론 행위자를 위한 보편적 규범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문과 9개항의 핵심원칙으로 이뤄진 헌장에서 ‘투명하게 보도하고 책임 있게 설명한다’(2조), ‘인권을 존중하고 피해를 최소화한다’(3조),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별에 반대한다’(7조), ‘디지털기술로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확장한다’(9조) 조항은 기존 규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내용입니다.

윤리 규정은 언론인들이 현실에서 직면하는 무수한 윤리적 딜레마를 풀어가는 길잡이 역할을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 일일이 처방을 줄 수는 없습니다. 공부할 때 정답보다 풀이과정이 중요하듯이 언론윤리는 일반적 원칙을 개별 사례에 적용하는 윤리적 사고를 내면화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기에 뉴스룸에서 기사 판단 못지않게 윤리적 판단을 놓고 뜨겁게 논의하는 언론 문화가 필요합니다. ‘언론윤리톡’은 그 촉매제가 되기 위해 앞으로 언론윤리와 관련한 다양하고 실천적인 논의를 펼쳐 나갈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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