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다시 축구와 정치의 시간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브라질은 4년마다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축구대회와 대통령 선거라는 2개의 큰 행사를 치른다. 20여년 간의 군사독재정권이 종식되고 1980년대 중반 민주주의가 회복된 이후 공교롭게도 월드컵과 대선이 같은 해에 열리고 있다. 브라질 국민은 축구와 선거 때문에 4년에 한 번씩 환희와 좌절을 맛보고 있는 셈이다.


올해는 빅 이벤트가 연말에 몰렸다. 10월 한 달간 대선 정국(2일 1차 투표·30일 결선투표)이 이어지고 새 정부 출범 준비가 한창일 무렵인 11월21일부터 12월18일까지는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진행된다. 월드컵은 통상 6월에 열리지만, 이 시기 카타르의 기온이 섭씨 40도를 넘어 11월로 개최 시기가 변경됐다.


브라질은 남미 지역 예선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1위를 질주하며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일찌감치 확정했다. 이로써 1930년 1회 우루과이 월드컵부터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본선에 진출한 유일한 나라라는 전통을 이었고, 이제 월드컵 우승이라는 목표를 정조준하고 있다.


브라질은 1958·1962·1970·1994·2002 월드컵에서 정상에 오른 통산 5회 우승국이다. 그러나 2002 한일 월드컵 우승 이후엔 4강 문턱을 넘지 못했다. 특히 1950년 이후 64년 만에 자국에서 개최된 2014 월드컵 4강전에서는 독일에 1:7로 충격적인 참패를 당하면서 축구계는 물론 전 국민이 집단 패닉 상태에 빠지는 악몽을 경험했다. 거듭된 실패에 “브라질 축구가 20년 전에서 멈췄다”는 냉정한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브라질 국민은 2022 월드컵이 ‘삼바 축구’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를 열망한다. 상파울루에서 발행되는 유력 일간지는 신년호 스포츠 특집기사 제목을 “브라질은 카타르에서 다시 큰 꿈을 꾸고 있다”고 달아 20년 만의 월드컵 우승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영국의 도박업체 ‘베트페어’(betfair)가 내놓은 2022 월드컵 우승 확률은 브라질과 프랑스가 각각 14.3%로 1위였다. 브라질 축구팬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과연 브라질은 월드컵 통산 6회 우승이라는 대업을 달성할 수 있을까?


월드컵과 대선의 상관관계에 관심이 쏠린다. 그 동안은 월드컵 성적이 대선 투표율과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양상이었다. 2002년에 브라질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축구광인 좌파 후보 룰라의 인기가 급상승해 그해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2018년엔 권력형 부패 스캔들과 좌파 호세프 전 대통령 탄핵, 경제 침체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된 상황에서 브라질이 월드컵 8강에 그친 데 따른 실망감까지 더해지면서 대선 투표율이 저조했고, 이것이 극우 후보 보우소나루의 승리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는 평가가 따랐다. 순서는 바뀌었으나 올해 역시 월드컵 열기가 대선 분위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올해 대선은 룰라 전 대통령과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이 양강 구도를 형성한 가운데 과거 연방판사 시절 부패 수사를 이끌어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세르지우 모루 전 법무장관이 중도 진영에서 대안으로 주목 받으며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조사의 오차범위를 고려하면 룰라 전 대통령이 1차 투표에서 당선을 확정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1차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어 결선투표가 성사돼도 룰라 전 대통령의 압승이 예상된다.


룰라 전 대통령의 인기를 업고 그가 속한 좌파 노동자당도 지지율 상승세를 타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노동자당 지지율은 28%였고 다른 정당들은 한 자릿수를 넘지 못했다. 선호하는 정당이 없다는 응답이 54%를 기록해 현재의 정당 구조에 대한 불신을 반영했으나 노동자당의 약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현재의 판세가 유지돼 룰라 전 대통령이 올해 대선에서 승리하면 2016년 중반 호세프 전 대통령 탄핵으로 몰락한 좌파 정권이 7년여 만에 부활하게 된다. 나아가 아르헨티나(Argentina)-브라질(Brazil)-칠레(Chile)를 묶는 ‘남미 ABC’를 좌파 정권이 장악하면서 중남미 정치구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이른바 제2의 ‘핑크 타이드’다. 핑크 타이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중남미에서 온건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 세력이 득세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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