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애국기사 제조기’로 불리는 환구시보의 후시진(胡錫進·61) 총편집인(편집국장)이 돌연 은퇴를 선언해 화제다. ‘중국 공산당의 비공식 대변인’으로 불리며 베이징 지도부의 신임이 두텁던 그였기에 퇴진은 숱한 추측을 낳았다.
1948년 중국 공산당 기관지로 출발한 인민일보는 1980년대부터 전 세계로 해외 특파원을 보냈다. 그런데 인민일보는 지금도 평일 20면, 주말 8면에 불과할 만큼 지면이 적다. 특파원 상당수가 일주일에 한 건도 기사를 쓰지 못하고 허송세월했다. 이에 회사가 “거액을 들여 각국으로 파견한 이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수익도 창출하자”며 1993년 창간한 매체가 환구시보다.
환구시보는 인민일보·신화통신 등 정론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 타블로이드 판형인 신문의 1면은 단 한 건의 기사로 채워진다. 민족주의 정서가 가득한 제목을 달아 독자의 감정을 최대한 자극한다. 과거 한국의 지하철에서 볼 수 있던 무료 일간지와 구성이 비슷하다. 쉽게 말해서 ‘작정하고 돈을 벌려고’ 만드는 신문이다. 언론학계에서는 환구시보가 ‘돌격대장’ 역할을 맡아 중국 공산당의 속내를 국제사회에 ‘질러 본’ 뒤 돌아오는 여론을 가늠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래서 중국 언론이 세계 각국에 ‘막말을 했다’고 하면 출처는 거의 환구시보다. 과거 우리나라 종편에 출연하는 일부 논객처럼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에게 끝없이 조롱과 분노를 쏟아 내는 것과 비슷하다.
환구시보는 미국과 영국, 일본, 호주 등 중국과 갈등을 빚는 모든 나라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해 지지층과 안티팬을 동시에 양산한다. 일부 중국 전문가들은 “환구시보는 인민일보의 수익사업일 뿐이다. 중국 정부의 입장이 담겼다고 볼 수 없으니 크게 신경쓰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이징 외교가의 생각은 다르다. 주요국 정부들은 환구시보에 악의적인 기사가 실리면 신문사가 아닌 중국 정부에 항의한다. 매체의 논조를 당국이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환구시보는 지난해 10월 방탄소년단(BTS)이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에서 “6·25전쟁은 한미 양국이 겪은 고난의 역사”라는 취지로 말한 것을 두고 “중국을 무시했다”고 호도해 논란이 됐다. 한국전쟁을 ‘항미원조(미국의 침략에 대항해 북한을 도움)’로 규정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려고 의도적으로 ‘악역’을 자처했다는 느낌이다.
시 주석은 환구시보의 홍보 방식을 대단히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의 ‘늑대외교’(중국과 갈등을 빚는 국가를 강하게 맞받아치는 외교 기조)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어서다. 2019년 홍콩 명보는 소식통의 말을 빌려 “시 주석이 후시진을 크게 칭찬했다. 당국도 각 기관에 ‘환구시보를 본받으라’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환구시보 기사는 중국 지도부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면이 있다. 그러나 ‘중국은 늘 옳고 서방은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적 논리가 건전한 여론 형성에 악영향을 준다는 비판도 많다. 쓰기에 따라서 사회에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언론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최근 후 편집인은 자신의 웨이보(중국판 트위터)를 통해 “라오후(老胡·자신의 애칭)는 이제 은퇴할 때가 됐다. 현재 퇴직 수속을 밟고 있다”고 밝혔다. 총편집인 직무에 정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갑자기 떠나는 것은 최근 불거진 불륜 및 혼외자 논란 때문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말 부편집인 돤징타오는 “그가 전현직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2명의 혼외자를 두고 있다”며 공산당 감찰기구에 고발했다. 언론인으로서 모으기 힘든 거액을 모았다는 폭로도 이어졌다. 해당 의혹이 사실이라면 후시진은 엄중한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그간 공산당에 보여준 충성을 감안해 ‘명예롭게’ 떠날 수 있게 지도부가 길을 열어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의 은퇴에 맞춰 환구시보는 지금까지 없던 사장직을 신설했다. 인민일보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매체로 키우려는 당국의 의지가 담겼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환구시보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전적으로 시 주석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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