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5호선 운행 지연.’ 지난 20일 아침, 광화문역 등에서 열린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언론에 기록된 방식이다. 일부 언론사는 그들이 왜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시위에 나섰을까, 묻고 조명했다. 다만 상당수는 안전문 파손이나 출근길 시민들의 불편에 더 주목했다. 왜 그랬을까 물어보면 이미 20년이나 묵은 문제이니 ‘뉴스’ 가치가 없다거나, 저번에 한 번 다뤘는데 이번에 또 다루긴 그렇다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악의적이라고 단정하기엔 콘텐츠 생산에 어떤 현실적 한계들이 존재한다는 걸 나 역시 너무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결과물을 보면 이 상황이 정말 바람직한 것인지 강한 의문이 든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에서 ‘장애인 시위’를 검색하면 지난 20일 하루 동안 총 34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그런데 같은 날 ‘김건희 경력’으론 142건의 기사가, ‘이재명 아들 도박’으론 107건의 기사가 나온다. 대선 주자 검증이니 저 문제들이 훨씬 중요하다고 한다면 ‘이준석 조수진 충돌’로 51건의 기사가 검색되는 건 어떻게 항변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누군가에겐 생존권의 문제인 이동권 투쟁이 정당 관계자들의 입씨름보다 덜 중요하다는 게 이날 언론이 내린 결론이었다.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언론은 사실 일반 시민에도 무관심하다. 그걸 확인했던 게 이번 ‘누구의 목소리가 뉴스가 될까’ 기획이었다. 지난 2년 반 동안 언론에 인용된 발언자를 분석했더니 전체 발언자의 약 1.7%에 불과한 1110명이 전체 인용량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1110명 대부분이 주요 정치인, 대기업 CEO, 전문가 등으로만 구성돼 있었다.
언론에 한 줌 등장한 일반 시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소환되지도 않았다. 범죄자, 사건·사고의 희생자, 환자 등 분류에 따른 특정한 역할로만 언론에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이 만드는 다양한 세상에서 언론은 아주 일부의 목소리만을 과대 전달한다는 사실을 여러 수치로 확인했다.
이젠 언론사들이 솔직해졌으면 한다. ‘50~60대, 남성, 관리자’ 등 특정 독자만을 노릴 것인지, 아니면 다양한 독자를 노릴 것인지. 전자를 선택한다면 당연히 지금 그대로 있어도 된다. 그런데 후자로 노선을 정했거나 앞으로 노력할 생각이라면 좀 더 분발해야 할 듯싶다. 현재 여러 언론사들이 이른바 MZ세대를 위한 콘텐츠와 서비스를 시도하긴 하지만 여전히 전체 기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약할뿐더러 그 이상의 확장성은 찾기 힘들어서다.
해외에선 ‘생존’을 위해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6월 지역 현안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오피니언 섹션 ‘미국 전역의 음성’을 신설해 지리적, 인구 통계적으로 다양한 기고자 기반을 구축했다. 8월엔 10대들의 시각으로 사회 이슈를 담아내는 ‘미국의 10대’ 연재물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뉴스룸 내부적으로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가디언은 지난 몇 년간 인종 및 성별 구성비 격차를 모니터링 해 공개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역시 지난 2월 ‘뉴스룸 다양성 보고서’를 발표하며 2025년까지 흑인 및 라틴계 간부 비율을 50%로 늘리고, 향후 채용 시 지원자의 지원 요건에 인종과 성, 출신 등 다양한 계층을 추가한다고 했다.
우리라고 못 할까. 이미 한겨레신문과 부산일보에선 여성 전문가 DB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른 언론사들도 충분히 시도할 수 있다. 자신이 축적한 경험과 문화, 기자 집단이 점하고 있는 자리가 얼마나 한쪽으로 쏠려 있는지 인식한다면, 또 나와 다른 위치와 경험, 시선을 배우려 노력한다면 우리 역시 훨씬 폭 넓은 독자층에게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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