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선거 사기, 외국 세력의 개입, 1월6일을 위한 가능한 조치들 (Election Fraud, Foreign Interference & Options for 6 JAN)> 이란 제목의 36 페이지 분량의 파워포인트 문서가 트위터를 뜨겁게 달궜다. 미 국회의사당 폭동 하루 전인 지난 1월5일에 작성된 것처럼 보이는 이 문건에는 2020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허위 정보들과 선거 불복을 위한 극단적 계획들이 상세히 담겨 있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당초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상당한 표 차이로 선거에서 이기고 있었으나 미국 8개 주(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미네소타, 조지아, 네바다, 애리조나, 뉴멕시코)에서 사망자, 비시민권자 등에 의한 불법 투표와 개표 조작으로 바이든 후보에게 패배했다. 또한, 중국 정부가 미국 투표 시스템과 자동 개표 소프트웨어를 통해 최소 28개 주에서 선거 조작에 개입했다. 이에 따라 전자투표가 이뤄진 모든 주의 결과가 유효하지 않음을 선언하는 한편,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안보 비상 사태를 선포해야 한다.’
문건에 담긴 선거 부정에 대한 주장들은 낯설지 않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 지지자들을 통해 이미 여러차례 확대·재생산해온 음모론들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회에서 차기 대통령을 인준하기 하루 전날이자 의사당 폭동 하루 전날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문건에 국가 비상사태 선포 등 자칫 국가 위기로 이어질 만한 극단적 제안들이 담긴 데 대해 시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일한 오마 민주당 하원의원(미네소타)은 해당 문건을 두고, “쿠데타를 위한 계획”이라며 “그 결과가 어땠을지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해당 문건이 더욱 논란이 된 것은 마크 메도우스 전 백악관 비서실장이 같은 제목의 파워포인트 문서를 1·6 국회의사당 난입 사태를 조사하고 있는 하원 특별위원회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누가 이 문서를 작성했는지, 메도우스 전 실장에게 이 문건을 보낸 것은 누구인지, 혹은 메도우스 전 실장이 이 문건의 내용을 진지하게 고려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메도우스 전 실장이 제출한 자료는 38페이지 분량으로, 트위터에 유포된 문건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해당 문건 작성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퇴역 중령 필립 월드론이 메도우스 전 실장은 물론 트럼프 전 대통령과 측근들을 여러 차례 만났고, 1월5일 해당 문건을 트럼프 측근들과 공화당 의원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건에 담긴 극단적 조치들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권위주의 독재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비민주적 선거 불복 계획이 백악관과 의회에서 논의됐다는 사실은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1월6일 트럼프의 대선 불복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조 바이든 차기 대통령의 인준을 막기 위해 국회의사당에 무력으로 난입한 사건은 그 자체로 이미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치명적 오점을 남겼다. 11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건의 진실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도 치유되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이 선거결과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선동, 입법부를 상대로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도 모자라, 차기 정부 인준을 거부하는 쿠데타로까지 번질 위기에 놓였었다는 사실은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선거는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 수단으로, 간접민주주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핵심적 제도다. 때문에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선거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폭력적이거나 비민주적 방법으로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일과 같다. 한 트위터 사용자의 “파워포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힐 말은 아마도 ‘민주주의의 종말’일 것”이라는 자조적인 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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