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역사 창조의 선두자 전두환 장군>. 김길홍 경향신문 기자가 1980년 8월19일부터 4회에 걸쳐 보도한 전두환 찬양 기사 시리즈의 제목이다. 경향신문 보도 이후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인간 전두환>(조선일보), <솔직하고 사심 없는 성품-전두환 대통령 어제와 오늘 합천에서 청와대까지>(중앙일보), <우국충정 30년-군 생활을 통해 본 그의 인간관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동아일보),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육사 입교에서 대장 전역까지>(한국일보) 등 언론사들이 앞다퉈 ‘인간 전두환’ 시리즈에 뛰어들었다.
기자협회보는 1988년 <전두환 체제 구축에 협조한 언론인들> 5회 시리즈를 연재했다. 1988년 12월2일부터 1989년 1월1일까지 보도한 시리즈에서 기자협회보는 “전역하지도 않은 현역군인을 전임 대통령의 하야 성명발표가 있자마자 ‘사생관(死生觀) 선 의리와 정직의 성품’으로 칭송하며 차기대통령으로 부각시켜 ‘새 시대 새 영도자’로 이름붙인 언론계의 대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기자협회보는 해당 시리즈를 통해 신군부의 5·17 쿠데타부터 전두환씨가 대통령에 옹립되기까지 5공 체제 창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기자와 기사들을 조목조목 풀어냈다.
기자협회보 보도에 따르면 언론은 5·17 쿠데타를 예고하는 등 5공 체제 구축을 위한 사건들을 사전에 인지해 정지작업을 벌였다. 이는 5·17 긴급조치 국보위 탄생, 공무원 숙정, 삼청교육, 과외 금지조치 등 신군부의 정책 미화와 전씨의 찬양 보도로 진행됐다.
신군부 정권 수립에 앞장섰던 언론인들은 정치권에 진출하거나 중견 언론인이 됐다. 기자협회보는 “김길홍씨는 당시 최대 실세 권정달 정보처장과 동향이라는 인연에다가 신아일보 청와대 출입 기자에서 신아일보 폐간정보를 재빨리 입수, 경향신문 정치부장대우로 옮겨 5공 언론창출의 새 주역이 됐다”며 “이후 전 찬양열전으로 일약 신군부의 실세로 부각, 허화평 정무수석 밑에서 언론담당 2급 비서관을 지냈고 (중략) 6공에서는 민정당 국회의원이 돼 화려한 변신의 대표 격이 됐다”고 보도했다.
시리즈가 연재될 당시는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 등 언론학살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 청문회가 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사에는 당시 언론사 데스크는 물론 일선 기자들의 실명까지 언급됐고, 보도 이후 파장 또한 엄청났다.
시리즈를 보도한 당시 김종찬 기자협회보 기자는 보도 이후 각종 협박과 항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기자협회보는 시리즈 3회차인 <쿠데타 폭력성을 언론이 미화>에 “본 시리즈와 관련 기명 기사에 올려진 언론인들 모두가 반드시 체제구축에 협조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를 필자가 밝혀왔다. 이름이 밝혀짐으로써 개인의 명예가 실추된 점에 대해서 필자는 유감의 뜻을 표했다”고 알림을 쓸 정도였다.
김 기자가 보도 당시 김시욱이란 필명을 쓴 이유도 이러한 파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김종찬 브레이크뉴스 정치경제 기자는 “당시 편집회의에서 실명으로 기사가 나가면 시리즈를 끝내지 못할 거라는 편집위원들의 의견이 나와 필명을 쓰게 됐다”며 “기자협회보가 부역한 기자들의 실명을 끄집어냈는데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언론인들의 실체적 진실을 끄집어낸 보도”라고 설명했다.
전두환 체제 구축에 협조한 언론인들-5·17에서 대통령에 옹립될 때까지
-기자협회보 1988년 12월2일자 3면
(1) 5공 체제 창출에 결정적 역할
광주항쟁 보도 각사성향 드러나, 고급정보 과다 따라 언론사 향배 좌우돼
서울·경향 사설로 중대사건 예고하기도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 경향신문이 80년 8월19일부터 4회에 걸쳐 전단기사로 연속 게재, 언론계에 일대 돌풍을 일으켰던 ‘특종’ 제목이다. 전역하지도 않은 현역군인을 전임 대통령의 하야 성명발표가 있자마자 “사생관 선 의리와 정직의 성품”으로 칭송하며 차기대통령으로 부각시켜 ‘새 시대 새 영도자’로 이름붙인 언론계의 대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경향신문이 이 특종을 단독취재하기 시작하자 모든 신문들이 앞 다투어 ‘인간 전두환’ 시리즈에 뛰어들었지만 그 내용의 대부분이 경향시리즈를 뒤늦게 베끼는 데 불과해 당시 이 기사를 썼던 김길홍씨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특종을 쳤다”는 일화를 남겼을 정도다.
김길홍씨는 당시 최대 실세 권정달 정보처장과 동향(안동)이라는 인연에다가 신아일보 청와대 출입 기자에서 신아일보 폐간정보를 재빨리 입수, 7월22일 경향신문 정치부장대우로 옮겨 5공 언론창출의 새 주역이 됐다. 이후 전 찬양열전으로 일약 신군부의 실세로 부각, 허화평 정무수석 밑에서 언론담당 2급 비서관(당시 1급은 이수정)을 지냈고 84년 허문도씨가 문공차관에서 정무수석으로 옮김과 동시에 1급으로 승진, 이어 6공에서는 민정당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돼 화려한 변신의 대표 격이 됐다.
경향신문이 이처럼 돌풍을 불러일으킨 것은 7월6일 서울신문 이진희 주필이 신임사장으로 옮겨 앉으면서 시작됐다. 그 이전의 서울신문은 사실상 ‘5·17 긴급조치’를 충분히 예고시켜 주고 있었다. 5·17조치가 떨어지기 직전 사설 제목은 <지금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더 늦기 전에 진로를 바로 잡아야 한다>(5월17일자)이다. 그 이전에는 <안이한 안보관을 우려한다- 북괴의 남침기도는 허상이 아니다>(14일) <시민은 공감하지 않는다-상황을 인식하여 학원으로 돌아가라>(15일) <경제의 파국을 우려한다-지금은 그 수습에 합심 전력할 때다>(16일)로 벌써 전단으로 큼직히 채워진 사설에서 중대사태가 임박했음을 시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17일자 사설에서 “새로운 국민적 구심작용”을 요청했으며 공무원 숙정도 이때도 벌써 직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었다. ‘안개정국’으로 대변되는 당시 상황에서 시국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실세격인 신군부와 동반자이거나 최첨단의 정보통로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엄격한 검열지침에 의해 신문이 제작됐었음을 감안하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여권 매체의 주역격이었던 서울신문도 이진희씨가 경향신문으로 옮기면서 주도권을 뺏겨버린다. 말하자면 최고의 정보통이 차지했던 당시의 비중이 얼마나 컸던 가를 입증하는 사례다. 아울러 이것은 이후 언론은 물론 온 민족이 겪어야할 대 시련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씨의 경향신문 사장 취임 이전인 6월9일 계엄검열을 거부했던 6명의 경향 기자를 용공혐의를 씌워 전격 연행했던 것이 언론학살의 구체적 실체의 시작이요, 이 사장 취임의 사전포석이었다면 5공 체제 구축을 위한 일련의 사건들도 언론이 앞서 정지작업을 벌였고 이에 따라 주도면밀히 진행됐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5공 체제 구축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은 5·17 긴급조치 국보위 탄생, 공무원 숙정, 삼청교육, 과외 금지조치 그리고 전씨의 개인이미지 부각으로 진행됐다. 이것 모두가 특정 매체들에 의해 미리 문제점을 부각시키고는 개혁이라는 미명하해 필연적 상황으로 몰고가버린 흔적이 역력하다.
이때 어느 매체가 이를 빨리 알고 제일 선두에 섰느냐가 사실상 최대의 진가로 평가했다. 이로써 매체의 비중이 바뀌기 시작했음은 물론, 차후 언론인들의 부침과도 직결됐다.
경향신문의 경우 이씨가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자체숙정을 공언하고 7월10일자 사설 (<사회개혁의 거창한 첫걸음>)에서 “국보위의 공무원 숙정은 참으로 속 시원한 일”이라고 극구 칭찬하였으며, 뒤이은 제2, 제3의 대폭 숙정이 뒤따를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듯 현실적 과제와 외국의 사례를 들춰가며 <숙정에서 사회개혁까지>를 시리즈로 엮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5공체제하에서의 언론의 성격규정과도 연결된다. 이후 언론은 사건이 있고 없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공인 기관이 됐고, 사건의 해석권을 쥔 권위적 존재로 군림하게 됐다. 이 또한 5공 체제 유지에 절대적 요소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 하나 주목해야 될 사실은, 이런 사안을 다룸에 있어 시론이나 칼럼 특집좌담 등과 누구를 등장시켰느냐는 점이다. 당시로써는 언론당사자나 유명인사들 정도라면 거의 모두가 신군부의 실세 등장과 일련의 개혁조치들이 깊이 관련이 있음을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 그 ‘중임’을 자임하고 나선 것은 새로운 권부와 접촉하겠다는 저의가 깔려있음은 명백한 이치다.
그런데 이와 달리, 당시 신군부세력들의 비밀접촉을 통해 정치권이 짜여지기 시작했음을 감안하면, 그 비밀접촉의 정보를 가장 정확하게 읽어내는 매체야말로 실세에 밀착되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결국 80년의 언론을 되새겨보면 이것은 그대로 입증되고 있다. 이는 특히 5월과 8월 사이에 집중되는데, 이때 이미 상당한 접근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언론매체들이 여기에 상당히 주력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접근은 당시 언론인 대량 숙정과 동시에 병행돼 일부 데스크와 일선기자들이 정보 수집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도리어 여기에 뒤진 언론매체들이야 말로 당시의 언론 상황에 상당부분 저항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기도 하다.
결국 이미 여권매체로 굳어버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론사주와 데스크가 인물선정에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이를 5공체제하의 각 언론사를 비교하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등장시킬 필요가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여기에 기여했던 언론인 대부분이 정가나 관계요로에 전격 진출하거나 언론계 내에서 중진으로 급성장했던 점이다.
이런 상황은 전 씨의 동정과 사진이 1면 좌측상단에 반드시 끼는 소위 ‘5공 언론의 전형’이 자리 잡는 9월 초 전까지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이후는 ‘보도지침’(홍조실 설치는 81년 1월)에 의해 모든 언론들이 비슷한 모습을 띄게 된다. (이것 역시 경향신문이 주도)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신군부와의 밀착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지 않은 밀월관계다. 그 구체적인 족적이 신문제작을 통해 내비쳐진 경우는 많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 언론인들과도 직접 연결된다.
단지 이것들이 7, 8월의 언론인 숙정과 11월의 언론통폐합과 동시에 진행됐다는 점 때문에 ‘조역’을 구분할 수는 있다. 실제로 각 언론사내에 하달된 블랙리스트에서 빼주는 조건으로 전 찬양열전에 부역자로 등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민족적 비극이 초래됐으며 상당한 언론인들이 고난의 길을 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공과는 달라진다. 또 그 정도의 영향력과 체제에 대한 사전지식은 언론인 정도라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도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울러 이들 중 상당수가 이를 빌미로 이후 중견 언론인으로 급성장했다.
그 분기점은 역시 5.18 광주민중항쟁의 보도부터다. 첫 보도는 5월22일 그것도 계엄사 발표 (21일)가 전부였는데 반해 서울신문은 이 날짜에 이미 이를 사설로 다루고 있다. (제목 안보적 중대사태이다) 이어 사건자체는 일체 보도치 않은 채 23일자 1면에 <북괴 방송이 광주사태만 집중적 폭동>이라는 묘한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24일에는 사회면 톱으로 <광주시위 선동 남파간첩 검거(서울)>을 올려놓고 옆에 <공포의 광주 유혈소요 6일>이라는 제하기사로 18일 이후의 공공건물 파괴상황을 일자별로 게재했다. 이와 달리 경향신문은 22일자 1면에 <광주 일원 심각 사태> 통단으로 다루고 23일, 24일 계속 관련기사를 삭제당해 큼지막한 급조광고로 대체하는 비운을 맛봤다. (이와 관련 6월9일 6명의 기자가 용공혐의로 연행됐고 언론인 대학살의 시발점이 됐다) 반면 24일자 사회면 톱 기사로 <북괴 간첩 1명 검거>가 급히 끌어올려졌다.
그런데 이것은 ‘5·17조치’와 관련, <모두가 자성 자숙할 때다>(5월19일자)라는 사실은 게재한 것과 5월22일자 사설에서 <광주 소요 이성과 자제로 빨리 수습 되어야 한다>는 신속성을 보인 것과 묘한 대조를 보인다.
특히 5.17 관련 사설에서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느 개인이나 집단과 학생 학원을 정치적 기타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도 이용하려 들거나 선동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계엄사령부 이른바 권력형 부정축재와 사회불안조성혐의 등으로 친여권과 재외 지도급인사 등 연행, 조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갖고 그 귀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힌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당시 데스크와 일선 기자 사이의 상이한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한편 동아일보는 5월19일자부터 5일간 사설을 뺀 채 신문을 발행했고 23일 광주특별취재반의 송고 기사를 ‘수습 차원’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사회면 톱 <오열 광주...새 질서 찾기 진통>
한국일보도 임시취재반 구성, 사건보도를 시작했다. 23일 사회면 톱은 <유혈의 비극...처절한 광주시>이고 사설에서의 광주관련 언급은 일체 없다.
중앙일보는 5월19일 <자제와 화합으로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자>는 사설을 통해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엄령의 확대 시행은 그 목적이 사회질서, 사회활동의 정상화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일 수 밖에 없다” 고 5.17 정당성을 역설했으며, 특별취재반을 통해 수습국면을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좀 다르다. 역시 임시 취재반의 송고기사로 수습기미를 23일부터 보도하기 시작했으나 사회면 톱 <폐허 같은 광주...데모 6일째> 23일자에 <무정부 상태 광주 1주- 바리케이트 너머 텅 빈 거리엔 불안감만...>를 사회면 톱으로 올려놓은 것인데 당시 김대중 사회부장이 광주에 내려가 직접 송고한 기사로서 주목을 받았다.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의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트가 쳐져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이어 이 기사는 관계자의 말을 인용, 이 지역이 대치장소로 불리는 것을 부정하면서 시민수습대책위의 무기반납을 가로막는 방해가 여전함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었다.
광주항쟁과 관련해서 유일한 기명 기사라는 점도 독특했지만, 당시 계엄사에서 각 언론사 사회부장들을 현지로 조치, 광주시내는 둘러보지도 않고 계엄군 주둔 초소에서 계엄사측 주장만 듣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셈이 돼 이후 언론의 굴절을 앞서 예고하고 있다.
김시욱 언론인(필명, 김종찬 기자협회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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