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의 무단협 상황이 50일을 넘겼습니다. 과거 악덕 기업들의 전유물이었던 단체협약 해지가 오늘날 지상파 방송사에서 벌어졌습니다.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 사회의 본이 돼야 할 언론사가 노동 탄압에 앞장서고 있다는 시민사회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대주주만을 바라보는 경영진의 퇴행은 SBS 31년사의 오욕으로 남았고, 그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SBS 구성원들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공정방송 제도를 사측이 일방적으로 없앤 데 반발해 노조를 중심으로 구성원들이 저항하자, 사측은 단체협약 해지권을 빼 들었습니다. 공정방송은 방송노동자의 핵심적 근로조건입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려는 구성원에게 사측은 잔인한 폭력을 가한 겁니다. 이게 이번 SBS 무단협 사태의 본질입니다. 있던 공정방송 제도를 없앤 것도, 단체협약을 해지한 것도, 또 자주적 조합 활동 보장을 중단하겠다는 것도 모두 SBS 사측입니다.
사측이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한 이유는 단협에서 ‘임명동의제’ 조항을 삭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장과 공정방송 최고 책임자(시사교양, 편성, 보도 부문 최고 책임자)에 대한 임명동의제는 지난 31년간 SBS를 숱하게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대주주의 방송 사유화와 보도 개입을 끊어내기 위해 2017년 대주주와 노사 3자 합의로 도입됐습니다. 노조가 일방적으로 주장한 게 아니라 사측도 동의해 만든 제도입니다.
노조가 추천하거나 임명권을 행사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사측이 사장과 본부장을 직접 지명하고 임명합니다. 다만, 사측이 임명한 인사가 공정방송을 실현할 적임자인지를 종사자 최소한의 의견을 반영해 결정하자는 겁니다. 주주의 권한을 존중하면서도 적어도 우리 일터를 망칠 인사가 임명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제도가 작동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조합원만이 아닌 전체 직원의 60%(보도본부장 재적의 50%)가 반대해야 임명이 철회됩니다. 투표하지 않으면 찬성으로 간주합니다. SBS가 아닌 다른 어느 조직도 구성원의 60%가 반대하는 사람이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어렵습니다. 임명동의제는 대주주의 압력과 외부의 부당한 개입에 맞서 독립경영과 책임경영을 담보하고, SBS에서 공정방송을 실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그걸 사측이 일방적으로 없앤 겁니다.
이제 저항은 의무가 됐습니다. 노조는 노동의 가치와 공정방송을 훼손하는 사측의 퇴행을 반드시 막아낼 것입니다. 불공정 보도와 권력과 자본에 유리한 보도로 시청자 권익을 훼손했던 과거로의 회귀를 단호히 거부하겠습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지금, 불공정 보도로 시민사회가 등 돌린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조합원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공정방송의 가치를 지켜 시민사회와 시청자 권익에 복무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노동의 가치를 지켜 노동자의 권리가 존중받는 진보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입니다.
22일부터 파업 찬반투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터, SBS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측과 협상하겠지만, 구성원의 뜻에 반해 사측이 퇴행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일터를 잠시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때가 온다면 공정방송을 위한 SBS 구성원들의 굳센 의지를 믿고 SBS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고 연대와 지지의 마음으로 SBS가 정상화될 때까지 기다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SBS에서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고 공정방송이 꽃 피울 수 있도록 노조를 중심으로 한 SBS 구성원들의 싸움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SBS 무단협, 어느덧 53일… ‘무단협 상태’의 의미는?
지금 SBS는 무단협 상태다. 기사로도 실생활에서도 접하기 어려운 개념인 무단협은 노사 간 단체협약(단협)이 효력을 잃은 상황을 뜻한다. ‘무단협’이 정식 법률용어는 아니고, 노동현장에서 편의상 부르는 말이다.
SBS 무단협 사태는 사측이 지난 4월 노조에 단협 해지를 통고하면서 촉발했다. 이때 사측은 노사 합의로 단협에 명시했던 ‘사장·본부장 임명동의제’ 폐지를 요구했으나 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SBS 구성원들에게 임명동의제는 ‘공정방송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이후 SBS 노사는 협상을 19차례 진행했지만 합의안을 내지 못했다. 노조가 임명동의제 대상에서 사장을 제외하자고 한 발 물러섰는데도 사측은 강경했다. 결국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제32조 3항 ‘단협의 유효기간이 경과한 후…당사자 일방은 해지하고자 하는 날의 6월 전까지 상대방에게 통고함으로써 종전의 단협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이 현실에 적용됐다. 지난 4월 사측이 단협 해지를 통고하고 6개월이 흐른 지난 10월3일부로 SBS 노동자들의 임금, 인사, 휴가, 노조활동 등 권리를 담은 단협이 사라졌다.
SBS 31년 역사상 초유의 무단협 사태는 24일 기준, 53일째 지속되고 있다. 무단협은 SBS 내부뿐 아니라 언론사 중에서도 사례를 찾기 어렵다. 대형 언론사로는 MBC가 유일한 전례다. 2012년 10월 MBC 사측이 단협 해지를 통고한 후, 2019년 2월 노사가 새로운 단협을 체결하기까지 6년 4개월이 걸렸다. 그 사이 MBC의 경쟁력이 곤두박질쳤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대표 노무사는 “단협 해지는 이명박정권에서 노조파괴 수단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일반 사업장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회사 전체에 타격이 크기 때문”이라며 “SBS 사측의 행태는 노조활동에 숨통을 끊기 위해 구시대의 유물을 부활시킨 것”이라고 했다. SBS 사측은 단협 해지에 따라 다음달 1일부터 노조활동을 보장하지 않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노조는 오는 28일까지 파업 찬반 투표를 진행한다.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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