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이었다. 열이 심하게 났고, 아침에 일어나니 왼쪽 다리가 퉁퉁 부어서 걷기가 불편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봉와직염이라며 빨리 입원을 하라고 했다. 갑자기 입원을 해야 된다는 당황스러움도 잠시, 고열과 두통이 이어져서 한동안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있었다.
입원 4일째, 다리는 여전히 아팠지만 열이 가라앉고 입맛도 돌아왔다. 그제야 병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보였다. 깁스를 한 옆자리의 초췌한 중년 남성은 통화를 하며 “어쩌다가 내 팔자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남성은 손가락 힘줄이 끊어지는 산재를 당해 입원을 했는데, 간호사들에게 “할 일이 많아서 빨리 퇴원해야 한다”라고 외치다가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피고름을 빼고 있는 한 환자는 휴대폰을 쓰지 않았고, 병원비 중간 정산에서 카드 한도 초과가 떴다.
코로나19로 인해 면회가 불가능한 병실에는 활기가 없었다. 작은 신음, 찡그린 표정, 누군가의 통화에서 들리는 한숨들만이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새삼 나는 얼마나 낮은 곳에 귀를 기울이며, 시민으로서 고통을 함께 나누는 기자로 살아왔나 되돌아보게 됐다.
정부의 보도자료와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하는 관습적인 기사들은 누군가에게는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속 편한’ 말처럼 들릴 것이다. 최근 급속히 증가하는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만’ 보고 쓰는 기사들은 또 어떠한가. 중요한 이슈마저 사소화하고, 게임화시키는 ‘중계’에 가깝다. 언론이 멀찍이서 중계를 하는 동안, 정작 약자·소수자들이 겪는 암담한 현실은 잊힌다.
몇 년 전, 남자 기자임에도 젠더 관점의 보도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여성들이 겪는 중층의 억압과 차별 중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여성 문제’로 의제화되지 않은 지점이 너무나 많아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언론을 보면, 여성의 삶에 밀접하게 다가가야 하는 젠더 부문 보도에서 ‘중계 저널리즘’이 가장 만연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례로 여성가족부 캠페인 영상에서 “내가 오늘도 안전하게 살아서 잘 들어갈 수 있을까”라고 말한 한 여성 연예인을 향한 비난은 일종의 사이버 테러에 가까웠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그저 “누리꾼들에게 비난받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다”라고 전했다. 그렇게 수많은 젠더 폭력 피해자와 안전을 위협받고 있는 여성들을 대변하려던 여성 연예인의 발언들은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렸다.
젠더 보도에서 점점 ‘삶’이 지워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코로나19 이후 돌봄 부담이 늘어난 전업 주부들은 코로나19 이후 일상 회복 점수가(오마이뉴스 유명순 서울대 교수 인터뷰 인용) 평균보다 낮은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또한 여성 구직 단념자는 2021년 1월 기준 1년 사이에 65.5%가 증가했다(남성은 28.1% 증가). 한편 20대 여성 자살자는 2014년 378명에서 2020년 622명으로 64.5% 급증(이 기간에 20대 남성은 19.7% 증가)하기도 했다. 이런 통계들을 언론이 구체화시키지 못했고, 그래서 쉽게 묻혔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불평등의 여파는 오래갈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그 많은 기자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적어도 고통 받는 약자들의 곁은 아니다. 물론 고군분투하면서 ‘옳은 자리’를 겨우 찾아가는 동료기자들의 좋은 보도에 안도할 때도 있지만, 지속 가능성은 떨어져 보인다. 개인의 열의에만 의존할 수도 없다. 기자를 단순한 중계자로 전락시키는 구조를 뒤바꾸지 않으면, 우리 언론에 희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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