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KBS 사장 후보자가 국민 앞에서 비전을 밝히고 평가를 받는 절차가 2018년에 이어 횟수로 세 번째 시행됐으나 후보들의 연이은 자진 사퇴로 빛이 바랬다. 단독 후보 검증으로 축소돼 ‘국민 참여 보장’이란 취지가 다소 무색해진 데다가 이 과정에서 정파성 문제까지 제기되면서 사장 선임을 비롯한 KBS 지배구조 전반에 숙제를 남긴 셈이 됐다.
KBS 이사회는 지난 23일 ‘시민이 묻고 후보자가 답하다’ KBS 사장 후보자 비전 발표회를 개최했다. 200여명의 시민참여단이 사장 후보자의 정책발표와 질의응답을 듣고 평가한 점수를 이사회 최종 면접 점수와 합산해 최종 1인을 선정하는 방식은 2018년 보궐 사장 선임 때 시작돼 횟수로 세 번째를 맞았다. 앞서 두 차례는 이사회가 1차 검증을 거쳐 선발한 3명의 후보가 시민참여단 앞에서 공약을 밝히고 비교 평가를 받는 식으로 이뤄졌다. 이번에도 역시 이사회는 면접을 통해 3명의 후보를 비전 발표회와 최종 면접 대상자로 결정했다. 204명의 시민참여단에게도 3명의 후보가 제출한 경영계획서 등이 전달됐다.
그런데 비전 발표회를 하루 앞둔 지난 22일, 현직 부사장인 임병걸 후보가 돌연 후보 사퇴 의사를 밝혔다. 두 시간도 안 돼 서재석 후보의 사퇴 소식도 전해졌다. 결국 김의철 KBS 비즈니스 사장이 단독 후보로 남게 됐고, 23일 비전 발표회에도 김의철 후보가 홀로 참여했다.
최종 평가를 앞두고 후보들이 연이어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에 KBS는 그야말로 혼란에 휩싸였다. 두 후보의 사퇴 이유를 두고 무책임하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임병걸 후보는 “재직 중 대학원에 다닌 사실로 논란이 일었던 부분 때문에 이사회와 회사에 누를 끼쳐서는 안되겠다”고 이사회에 밝혔는데, 사퇴 이유가 될만한 흠결이 있었다면 애초에 지원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KBS 안팎에선 30년 전에 다닌 대학원 문제가 사장 후보로서 결격 사유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등 임 후보의 사퇴를 석연치 않게 보는 시각도 많다.
서재석 후보의 사퇴 이유는 더 황당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8월까지 야권 추천 몫으로 KBS 이사를 지냈던 서 후보는 임병걸 후보 사퇴 직후 “정파적인 구도 하에서도 끝까지 해 보자고 했던 노력도 여기까지인 듯하다. 이런 구도 하에, 남은 한 후보와 다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면서 “공정한 선발 과정이었다는 구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3파전일 땐 여권 이사들의 표 분산 등을 노려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가 양자 대결이 되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그러나 “정파적인 구도”를 탓하는 그의 사퇴 이유 역시 궁색하다는 평가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25일 성명에서 “겉으로는 ‘공정한 사장 선임’ 운운했지만, 양자 대결에서 본인의 승산을 가늠해 보고 중도 포기한 것이 아닌가”라며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셈하다가 선임 과정 전체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며 떠나는 그 마지막 모습에서 KBS인으로서의 당당함을 찾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이사회는 예정대로 27일 최종 면접을 진행한 뒤 시민참여단의 평가 점수를 합산해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할 사장 후보자를 결정할 방침이다. 시민참여단은 23일 비전 발표회 직후 각자 모바일로 김의철 후보의 사장 적합도에 대해 1점부터 최대 5점까지 점수를 매긴 상태다.
이사회는 당초 시민참여단 평가 점수 40%와 이사회 면접 평가 60%를 합산해 최종 후보 1인을 결정할 계획이었는데, 단독 후보로 상대평가가 불가능해져 사실상 김의철 후보에 대한 찬반 투표 성격이 됨에 따라 이변이 없는 한 김 후보가 그대로 사장에 내정될 가능성이 크다.
이사회에서 내정된 사장 후보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러나 사장에 임명되더라도 ‘정당성’ 논란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KBS 내부에서부터 절차상 하자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보수성향의 소수노조인 KBS노동조합은 “절차적 흠결과 하자가 뚜렷한 원천무효 상황”이라며 25일 서울남부지법에 KBS 사장 선임 절차 중지를 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KBS노조는 “현재의 KBS 사장 선임 절차를 즉각 중단하고 재공모 등이 이뤄져야 한다”며 김의철 후보 역시 즉각 사퇴할 것을 주장했다. 이사회는 긴급 논의 끝에 “게임에 앞서서 룰을 바꿀 수 없는 법”이라며 재공모 가능성 등을 일축했지만, 사장 선임을 둘러싼 여진은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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