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자협회가 기자들의 심리적 트라우마 실태를 조사한다. 뉴스룸 안팎에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기자들을 더는 외면해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커진 상황에서, 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한국형 트라우마 관리 가이드라인 제정까지 추진한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기자협회는 다음 달 회원들을 대상으로 ‘심리적 트라우마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조사에서 심리적 트라우마란 스트레스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완화되지 않거나 심해지는 경우를 말한다. 괴로운 기억과 관련한 감정이 강렬해서 일상의 업무나 가족관계, 대인관계,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이 부정당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정신적 고통이다.
기자사회에서 트라우마는 주로 재난·재해 현장을 취재할 때 발현한다는 인식이 많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들어선 기자를 향한 온라인 공격이 트라우마의 주요 원인으로 떠올랐다. 심한 욕설·성희롱 표현이 담긴 악성 댓글과 이메일, 기자 개인뿐 아니라 가족·지인들의 신상을 공개해 조롱하는 사이트, SNS상 정치인들의 좌표 찍기 등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기자들이 늘어났다.
기자들은 일상적인 업무 과정에서도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다. 이번 설문조사 문항 가운데 ‘트라우마를 느끼는 상황’으로 △취재 과정 △기사 작성 및 보도 과정 △데스크나 조직 내부에서 겪는 갈등(취재보도 과정, 내부 대응방식, 상사나 동료들과의 관계) △보도 이후 독자들의 반응(이메일·댓글·전화 등의 직접적인 항의) △취재나 보도 전후 취재원과의 관계 △보도 이후 소송 등 법률문제 등이 제시된 것을 보면 직무수행 전반에서 트라우마에 노출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각 언론사와 언론단체 차원에서 기자들의 트라우마를 관리하는 체계적인 대책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로 트라우마 문제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관련 교육이나 심리상담 지원을 시작한 언론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손을 놓고 있는 게 현실이다. 특수한 취재 상황이 아니라 기자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트라우마에 대한 현황 파악이 이뤄지지 않다보니 예방적 조치를 하지 못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기자협회가 실태 조사에 나섰다. 두 단체는 지난 3월 트라우마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관련 논의를 이어왔다. 구글 뉴스 이니셔티브와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부설 저널리즘 트라우마 전문 비영리기관인 ‘다트 센터’ 아시아태평양지부가 자문위 활동을 후원했다.
다트 센터에서 펠로우를 한 이정애 SBS 기자, 김나래 국민일보 기자, 임지선 한겨레신문 기자는 자문위에 참여해 이번 설문조사를 설계했다. ‘건강한 보도는 건강한 저널리스트에서 나온다’는 취지로, 조사 결과를 분석해 △기자들의 심리적·물리적 안전을 지키기 위한 교육·취재 가이드라인 △조직 문화·시스템 개선 △제도적 지원책 등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정애 기자는 “세월호 참사 이후 트라우마 이슈가 중요하다는 건 충분히 인지했지만 대책을 세우는 데 바탕이 되는 실태조사 자체가 전무했다. 기초적인 현황 파악부터 시작해 가이드라인의 방향성을 세우려 한다”며 “트라우마 관리 시스템은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고 건강한 저널리즘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동훈 한국기자협회장은 “대형 사건사고에서 겪는 트라우마도 심각하지만 요즘엔 온라인상 공격으로 심한 후유증을 겪는 기자들이 많다”며 “설문조사 시행과 그 다음 단계까지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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